말은 늘 나에게 너무 많은 소음을 만들었다.
누군가의 의도, 억양, 사회적 규범, 문맥이 뒤섞여
정작 마음이 닿아야 할 지점을 흐리게 만들곤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언어’가 인간을 연결하는 도구인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생산하는 매개라는 사실을 느껴왔다.
우리가 입으로 내뱉는 문장에는
늘 남의 기대와 사회의 형식이 흘러들어와 있었고,
그 안에서 내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을
순수하게 꺼내놓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말을 잃은 언어에 관심이 생겼다.
소리를 버리고, 침묵을 채택한 언어.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세계.
그게 바로 수어였다.
수어를 처음 보았을 때,
마치 한 사람이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손끝의 곡선, 손목의 속도, 표정의 변화,
말로 번역되지 않는 감정의 색채가
공간 안에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수어는 문장의 리듬이 아니라
몸의 리듬으로 의미를 전한다.
언어가 선형의 흐름이라면,
수어는 공간의 구조다.
하나의 동작이 단어가 되고,
시간의 간격이 문장 부호가 되며,
표정의 온도 차이가 감정의 층을 만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감각적으로 민감하게 느껴온 세계—
빛, 움직임, 숨결 같은 비언어적 신호들—가
언어의 형태로 재탄생하는 것 같다.
나는 돈과 관련된 지식도 배워왔지만,
그 배움은 언제나 “기능적 목적”에 가까웠다.
재무제표를 해석하는 시선이나
시장 심리를 읽는 감각은 익숙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이나 감정의 결을
정말로 느낄 수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어는 다르다.
여기는 목적과 효율이 먼저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가 먼저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수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존재 방식을 이해하고,
그 고요한 세계로 한 발 내딛는 일이다.
말의 세계에서는
내가 가진 지적 구조나 분석력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말 없는 세계에서는
손끝의 온도, 눈의 빛, 호흡의 속도 같은
아주 작은 감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섬세함은
바로 내가 오래전부터
가장 편안하게 느껴온 방식이기도 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수어를 배우고 싶다.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는 삶의 층위를 보기 위해.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른 언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고 싶기에.
언어는 꼭 소리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가 더 인간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자라나는 건 아닐까?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수어는
그 진실이 지나가는 조용한 통로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말해지지 않는 언어를 배우려 한다.
그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아마 사람을 조금 더 온전히
품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