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차원 합죽이의 시간

대화의 문법이 다른 나에게

by 신성규

나는 대화를 통해 배운다. 친구와 적합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주제로 전개되고, 다시 처음의 주제로 회귀하는 흐름은 내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흐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친구는 이 흐름이 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 알려주고 나는 내 앞서나간 흐름을 설명해준다. 다른 사람들과 진지하게 사고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면 나는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지?“라는 시선을 마주친다. 그 당황함 속에서, 나의 사고는 보통의 문법과는 다른 리듬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를 선형적으로 이어간다. 원인과 결과,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러나 나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순간이동하듯 도약하고, 다른 분야의 개념을 연결한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것은 내게 무의식적인 학습의 방식이다. 사고는 마치 음악의 즉흥 연주처럼 주제를 넘나들고, 구조를 연결하고, 본질을 잡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 리듬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때로는 불안하게 다가온다.


신기하게도, 특정한 사람들과는 이러한 사고의 흐름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자들, 혹은 분야를 넘나드는 다차원적 사고를 하는 자들과는 대화가 곧 탐험이고, 그 안에 이질감은 없다. 마치 내가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언어를 되찾은 듯한 편안함.


그런 대화에서는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해?”라는 질문 대신, “그 흐름이 재밌다. 계속 말해줘.”가 돌아온다.


세상은 범주화를 좋아한다. 나 같은 사람을 ‘사차원’, ‘또라이’라 부르며 불편함을 해소하려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리듬은 배제의 대상이 되고, 나는 그저 ‘조용히 맞춰주는’ 합죽이로 살아간다.


내가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연결을 이어가는 방식은 대개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 설명 속에서 나는 ‘왜 나 자신으로 대화하는 것이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피로를 느낀다.


나는 이제 안다. 나의 사고는 다르게 작동한다. 그리고 그 다름이 결함이 아닌, 조용한 능력의 양식이라는 것을. 합죽이로 살아가는 시간은 외로움의 산물일지 몰라도, 동시에 타인의 리듬에 귀 기울이는 섬세함이기도 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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