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문법이 다른 나에게
나는 대화를 통해 배운다. 친구와 적합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주제로 전개되고, 다시 처음의 주제로 회귀하는 흐름은 내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흐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친구는 이 흐름이 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 알려주고 나는 내 앞서나간 흐름을 설명해준다. 다른 사람들과 진지하게 사고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면 나는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지?“라는 시선을 마주친다. 그 당황함 속에서, 나의 사고는 보통의 문법과는 다른 리듬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를 선형적으로 이어간다. 원인과 결과,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러나 나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순간이동하듯 도약하고, 다른 분야의 개념을 연결한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것은 내게 무의식적인 학습의 방식이다. 사고는 마치 음악의 즉흥 연주처럼 주제를 넘나들고, 구조를 연결하고, 본질을 잡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 리듬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때로는 불안하게 다가온다.
신기하게도, 특정한 사람들과는 이러한 사고의 흐름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자들, 혹은 분야를 넘나드는 다차원적 사고를 하는 자들과는 대화가 곧 탐험이고, 그 안에 이질감은 없다. 마치 내가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언어를 되찾은 듯한 편안함.
그런 대화에서는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해?”라는 질문 대신, “그 흐름이 재밌다. 계속 말해줘.”가 돌아온다.
세상은 범주화를 좋아한다. 나 같은 사람을 ‘사차원’, ‘또라이’라 부르며 불편함을 해소하려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리듬은 배제의 대상이 되고, 나는 그저 ‘조용히 맞춰주는’ 합죽이로 살아간다.
내가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연결을 이어가는 방식은 대개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 설명 속에서 나는 ‘왜 나 자신으로 대화하는 것이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피로를 느낀다.
나는 이제 안다. 나의 사고는 다르게 작동한다. 그리고 그 다름이 결함이 아닌, 조용한 능력의 양식이라는 것을. 합죽이로 살아가는 시간은 외로움의 산물일지 몰라도, 동시에 타인의 리듬에 귀 기울이는 섬세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