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고찰

by 신성규

신부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육체적 사랑, 물질적 탐욕, 세속적 권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들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이들은 성직자라는 이름 아래 ‘거룩한 절제’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나는 흥미로운 패턴을 보았다. 흡연과 음주. 그것도 꽤나 중독적이고 반복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허용받은 유일한 쾌락의 공간이란 점이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역설을 던졌다. 자살은 기독교에서 명백한 죄악이다. 자기 생명의 절대적인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느리게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흡연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장기적으로 폐와 심장을 좀먹는 행위는 신성모독과 다름없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해 친구는 ‘의도성’을 기준으로 선을 그었다. 자살은 죽음을 목적으로 하나, 흡연은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살이 “삶을 포기하는 행위”라면, 흡연은 “삶 안에서 즐기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 관점은 놀라웠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파괴를 추구하는 것을 명확히 분리하려는 이 시도는 일견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그렇게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자해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일부는 분명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그 행위 속에서, 그들은 고통을 제어하고 쾌락을 경험하며 존재를 확인한다. 만약 자해가 단지 죽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살기 위한 방식이라면? 그렇다면 그 또한 흡연처럼 “쾌락을 통한 생존”의 한 방식일 수 있다. 결국, 파괴와 쾌락은 인간의 심리 안에서 묘하게 얽혀 있다. 어떤 이에게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고통조차 ‘쾌락’이 되며, 이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분리될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여기서 다시 고개를 든다. 성경은 몸을 ‘성령의 전’이라 말하며, 자신을 아끼고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위안을 찾고, 파괴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묻기도 한다. 어떤 신부는 담배 연기를 통해 현실의 무게를 날려보내고, 어떤 이들은 상처 난 피부를 통해 감정의 진실을 감지한다. 이 모든 것이 죄일까?


기독교는 쾌락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묻는다. 이 말은 곧, 쾌락이 타자를 해치거나 자기 존재를 파괴하는 수단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신부의 흡연은 단순한 ‘쾌락’일까, 혹은 절제된 삶이 남긴 고요한 자해일까?


나는 여전히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낀다. 신은 우리의 내면을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외적 행위의 옳고 그름보다는, 그 동기와 욕망의 구조를 꿰뚫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흡연이든 자해든, 우리가 그 안에서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직면하는 일이 더 본질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결국 이 질문은 이렇게 귀결된다.

“쾌락은 삶의 증표인가, 아니면 삶의 부재를 감추기 위한 연기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신부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영혼의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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