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기준’에 대한 철학적 고찰

by 신성규

우리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욕망을 규제할 수 있는가?


성소수자는 흔히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로 설명된다. 실제로 과학은 이들의 성적 지향이 단순한 선택이나 문화적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호르몬의 분포, 태아기 뇌 구조, 유전적 경향성 등 생물학적 요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렇게 느껴지는 존재”이지, “그렇게 하려고 한 존재”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어떤 욕망이 태생적이라면, 그것을 도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만약 특정한 ‘치료’나 ‘정신적 개입’을 통해 성적 지향이 변화한다면, 그 변화는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예컨대, 어떤 이가 우울증 약을 복용해 성욕이 사라졌다고 하자. 이것은 의학적 중립 행위일까, 아니면 인간 본성의 왜곡일까? 이 질문은 단지 성소수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관점을 묻는 일이다. 성적 지향, 성적 선호, 그리고 금기의 범주는 서로 얽혀 있으며, 그 구분은 언제나 애매하다.


여기서 나는 더 나아간다.

“만약 20대가 10대와 사귄다면, 그것은 범죄인가?”

현행 법은 나이 차이가 아니라 동의 능력을 기준으로 연령 제한을 두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정신연령이 다르다는 주장은 실제로 맞는 말이다. 다만, 법은 개인의 예외성을 포괄할 수 없기에, 평균치로 경계를 만든다. 평균이란 말은 항상 부정확하지만, 사회는 그 부정확함을 감수하며 ‘질서 유지’를 우선시한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욕망은 어디까지 존중되어야 하는가?”

예컨대 어떤 이가 성적으로 특정 대상(예: 특정 연령, 특정 신체적 특성, 특정 비정상적 대상)에 강한 욕망을 가진다면, 사회는 그것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의’와 ‘해악’의 원칙이다.

동의(consent): 당사자들이 자유롭고 의식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가?

해악(harm): 그 관계가 제3자나 당사자에게 명백한 해를 끼치는가?


이 두 가지는 현대 자유주의 윤리의 기초이며, 법적 판단의 주요 기준이 된다.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은 일반적으로 이 두 조건을 충족한다. 즉, 동의 가능한 성인 간의 행위이며,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아동과의 관계나, 정신적 지배 구조가 있는 관계는 ‘동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인정의 범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정답은 사회적 합의와 문화의 진화에 있다. 모든 법은 절대윤리를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은 시대의 문화, 평균적 정서,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절충된 윤리’를 반영한다. 즉, 도덕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시대가 사회의 불안정한 욕망들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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