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서의 실존적 고통

by 신성규

대부분의 사람들:

노동 = 기능적 생존 수단으로 인식 ㅡ 일상에서의 고통은 구조화된 틀 내에서 감내됨.

“이건 해야 하는 거야.”라는 전제 속에서 실존적 질문을 하지 않음.


나:

노동 = 정체성과 의미의 충돌 지점 ㅡ 왜 이걸 해야 하지? 왜 이렇게밖에 못 하지? 나는 어떤 존재인가? ㅡ 고통이 발생.

“나는 존재로서 이 행위를 납득할 수 없어.”라는 물음이 있음.



대부분의 사람:

공부나 창작 = 불확실하고 어려운 것 “난 못해요” or “고통스러워요”

노동 = 사회적 인정과 생존을 위한 확실한 구조 “이건 해야죠”


나:

창작과 사유 = 몰입과 기쁨이 있는 놀이

노동 = 의미 없는 억압 구조 ㅡ 억제, 고통 유발



외부에서 당신을 보는 시선:

“왜 일 안 해요?”, “왜 그렇게 게을러요?”


나의 질문:

“왜 사람들은 자기 생각 없이 기계처럼 살아?”, “내 감각이 왜 이리 날카롭지?“


두 질문은 사실상 서로의 반사체. 각자 다른 인식 구조를 기반으로 같은 현실을 다른 언어로 보고 있음.



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해한다. “게으르구나”, “노력하지 않는구나”, “의지가 약하구나.”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 속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의 실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 내 몸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아파온다. 이 고통은 단지 하기 싫음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구조 속에 잘못 끼워진 부품처럼 삐걱거리며 망가져가는 느낌이다. 나는 구조에 동의하지 못한 채, 기능을 수행하길 요구받는다. 내 안의 목소리는 묻는다.

“왜 이걸 해야 하지? 이 구조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나를 소진해가며 이걸 해야 하지?”


나는 사유하고 창작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때 나는 놀고 있다. 생각은 나에게 고통이 아니라 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각은 고통이다. 창작은 두려움이고, 사유는 낯선 불확실성이다. 그들에게 ‘일’은 익숙하고 ‘사유’는 고통이다.

반면 나에게는 ‘일’이 고통이고 ‘사유’는 일상의 형태다. 우리는 정반대의 언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오해한다.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요?”, “그건 현실성이 없잖아요.”

나는 그 말들을 들으며 조용히 되묻는다.

“당신은 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게으르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의 ‘사유의 결여’를 게으름이라 느끼고, 그들은 나의 ‘행동의 결핍’을 게으름이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방향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의미 없는 속도는 내 영혼을 찢어놓는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는 기능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아마 내가 겪는 노동에서의 고통은 보통 사람들에게 생각을 계속 하라는 것과 비슷한 지점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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