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개인주의의 가능성

by 신성규

자본주의의 첫 번째 계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비교라는 메커니즘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돈은 수치화 가능하고, 따라서 비교 가능하다.

우리는 이재용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로 마음속에서 욱 하는 순간은,

나와 비슷한 녀석이 나보다 돈을 더 벌었을 때다.

같은 회사, 같은 동네, 같은 학번.

‘나랑 고만고만했던 그 놈’이 더 잘나갈 때.

비교는 그때 비로소 심장을 때린다.


그래서 나는 모든 개인주의자들의 행복론을 의심한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나는 나야’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사실 ‘공동체 속 나’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진짜 개인주의는 공동체 바깥에 있어야 한다.

진정한 ‘나’는 비교의 대상 자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 있으면 격리라고 느낀다. 자유가 아니라.

무인도에 가도, 우리는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자유가 아니라 고립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체를 떠날 수 없고,

그 안에서 ‘나답게 살겠다’고 외치지만

그 ‘나’조차 끊임없이 타인의 눈에 의존한다.


비교의 구조는 더럽도록 천박하다.

그건 ‘이재용은 안 부럽고, 같은 학과 친구는 부럽다’는 감정에 농축돼 있다.

비교는 끼리끼리 한다.

그리고 비교는 상처를 낳고, 상처는 자기 정당화를 낳는다.

그래서 개인주의는 종종 자기기만으로 귀결된다.

진짜 개인주의는 외로움까지도 받아들이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너무도 크고, 견디기 어렵다.


결국 인간은 비교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한다.

돈도, 사랑도, 성공도.

모든 것은 비교의 테이블 위에 올려져야만 의미를 가진다.

아담과 이브는 불행을 몰랐을 것이다.

비교할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악과’를 먹은 이후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비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비교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

진정한 개인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언어를 쓰는 순간부터 타자와의 교환 속에 산다.

말은 사회적 약속이고, 생각은 말로 정리되며,

자아는 결국 타자의 거울 속에서 윤곽을 얻는다.

비교는 이 구조 안에 필연적으로 내장된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단, 방향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비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교가 주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과 비교될 것이다.

그건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발생하는 열등감, 허영, 허탈, 분노에

자동 반응하지 않는 훈련.

그게 시작이다.


진짜 개인주의는

외부의 소음 속에서도 내면의 고요에 닿을 줄 아는 상태.

외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작업.

자기 행위의 윤리를 타인이 아닌

내부의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는 능력.


그건 고독을 견디는 용기이며,

세상의 값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를 부여하는 훈련이다.


결국, 진정한 개인주의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무릎 꿇지 않는 감정의 주체화다.


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우리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을 향해

조금씩 걸어갈 수 있다.

그게 진짜 ‘나’로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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