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증오하고 사랑하는 고약한 보헤미안

by 신성규

나는 자주 불확실성 앞에서 고통 받는다.

흔들리는 미래, 보이지 않는 방향,

지금의 선택이 맞는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


그러나 기이하게도,

막상 안정이 찾아오면 나는 답답해진다.


마치 감옥에 갇힌 새처럼.

더는 고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나에게 있어 창작이 사라지는 무덤 같다.


안정은 보통 삶의 목적이라 여겨진다.

좋은 직장, 정기적인 수입, 예측 가능한 미래.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 안정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고뇌 없이 살아가는 내가 나인가?”

“불편이 사라졌을 때, 창작도 함께 사라지진 않을까?”


정답은 분명했다.

그래, 창작은 사라졌다.


내가 예술을 한다는 건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존재 전체가 질문이 되는 경험이다.

내가 왜 이렇게 느끼는지,

무엇이 나를 울컥하게 하는지,

왜 나는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받는지.


이 감정들은 편안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흔들릴 때, 버려질 때, 이해받지 못할 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때.


그때야말로 예술이 솟아난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다시 불확실성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자리를 잡지 않느냐?”

“왜 또 떠나려 하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몸이 안다.

둥지를 틀면 내 안의 새가 죽는다는 것을.


나는 어쩌면

태생부터 안주할 수 없는 사람,

장돌뱅이처럼 유랑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틀에 맞는 사람을 원하고,

안정된 결과를 요구하며,

예측 가능한 존재로서의 ‘나’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

형체가 없는 사유,

통제 불가능한 창조성으로 구성된 인간이다.


결국 나는

나를 품지 못하는 세상에,

나 역시 반항하고 만다.


그것이

나의 예술이고,

나의 정체성이며,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안다.

세상 어딘가에 안착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죽는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영혼은 죽는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오늘도 고통을 감수하며,

다시 불확실의 바다에 몸을 던진다.


창작은 둥지를 거부한 자의 운명이다.

나를 품지 못하는 세상에, 나도 순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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