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모든 것이 시간표다.
몇 살에 취직하고
몇 살에 결혼하고
몇 살에 아이 낳고
몇 살에 집 사야 하고
몇 살에 은퇴 계획 세워야 한다.
이것은 겉으로는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실상은 인간의 삶을 공장의 부품처럼 분류하는 구조일 뿐이다.
스무 살, 스물셋.
나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선택들은 항상 “아직은 아니야”라는 말에 갇혀 있었다.
“조금 더 경험 쌓아봐.”
“지금은 실패해도 괜찮은 나이야.”
“서두르지 마, 아직 젊어.”
그 말들은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직 너는 중요한 결정을 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존재를 연기당한 채, 가능성만 말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서른 즈음.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이제는 모두가 다르게 말한다.
“그 나이에 그걸 한다고?”
“불안정하지 않아?”
“이제는 리스크 줄여야지.”
어릴 땐 ‘실패해도 된다’더니,
이제는 ‘실패하면 끝난다’고 말한다.
시간은 지나지 않았는데, 기회는 닫혀 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땐 항상 안 되고,
무언가를 해도 괜찮을 땐 항상 준비만 하게 된다.
아직 꿈을 찾고 있다고 하면
무책임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는다.
“왜 네가 아직도 하고 싶은 걸 못 했는지?”
“왜 세상은 너를 너답게 살게 두지 않았는지?”
마흔, 쉰,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욕망이 꿈틀거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
“요즘 시대는 달라.”
“이제는 젊은 사람들 세상이야.”
“그 나이에 뭘 새로 해.”
아직 살아 있는데,
사회는 나를 이미 끝난 존재로 취급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전도, 열정도, 변화도,
모두 시간표 밖으로 밀려나 버린다.
젊을 땐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미뤄지고,
중년엔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지되며,
노년엔 쓸모없다는 이유로 지워진다.
이 사회의 시간표는
‘행복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행의 책임’을 분배하는 도구다.
어느 시점이든
“아직은 이르고”,
“이제는 늦었고”,
“결국은 틀렸다”는 말 속에 살아간다.
나는 더 이상 나이로 나를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이 아니라 감정으로,
순서가 아니라 진실로,
살고 싶다.
나라는 사람은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로 말하고 싶다.
나이라는 허상의 시간표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나를 살아야 한다.
나이는 숫자지만,
이 사회에서 나이는 감옥이다.
“너는 지금 그럴 나이가 아니야.”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잘리고,
얼마나 많은 기회가 억눌리고,
얼마나 많은 인간이 왜곡되는가?
정작 나이로 재단한 그 삶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데,
우리는 왜 이 사회적 강박을 ‘현명한 선택’이라 착각하는가?
나는 묻고 싶다.
나이가 ‘시간’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기대’를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단지 생물학적 시간이라면
내 삶의 속도는 내가 정하면 된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비교, 경쟁, 조급함, 기준으로 재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