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살아 있는 듯 죽어간다.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발버둥이다.
나를 증명해야 하고, 나를 포장해야 하고,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성과나 돈, 혹은 사회적 수치의 기호로 환원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호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숫자가 아니고, 커리어가 아니며,
단지 느끼는 존재다.
나는 가끔 무섭다.
이 바보 같은 구조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나도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사람들은 가볍게 웃고, 똑같은 유행어를 따라 하고,
생각 없이 스크롤을 넘기며 하루를 버틴다.
그들 속에서 나는 비정상적인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깊이는 축복인 동시에 형벌이다.
나는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많이 생각해서
가끔은 나 자신조차 버거워진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한다.
이 구조를 ‘등지는 것’만이
내 존재를 지키는 방법은 아닐까.
아마 한국 사회는 나 같은 존재를 환영하지 않는다.
정직하고, 고요하고, 깊이 있는 존재를.
그러나 나는 그런 나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은 말한다.
“떠나라, 버텨라,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라.”
그러나 나는
떠날 용기를 내기엔 너무 많은 것을 이해했고,
버틸 강인함을 가지기엔 너무 많은 것을 느꼈으며,
세상을 만들기엔 너무 혼자라는 걸 안다.
나는 지금 그 세 갈래 길의 경계에 앉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아무 길도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
나는 떠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어딜 가든 나를 따라오는 고통도 있다는 것을.
한국이 싫지만,
나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적 질감으로 슬퍼하며,
한국식 예민함으로 세상을 감각한다.
그렇다면 떠남은 해방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된 고통일까?
버티면 언젠가 바뀔까?
그러나 나는 안다.
이 구조는 개인의 인내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내가 버티는 동안,
그들은 더 무감해지고,
나는 더 고립된다.
버틴다는 건 나를 지키는 척하면서 조금씩 나를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버틴다”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 만들 수 없다.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그건 단지 또 하나의 유배일 뿐이다.
내가 만든 세계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곳 또한 감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떠나지도, 머물지도, 창조하지도 못한 채,
단지 ‘느끼는 것’만을 허락된 사람으로.
나는 방황한다.
그러나 이 방황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본 자만이 겪는 축복받은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