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며

by 신성규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건을 살아내지 않고,

그 사건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게 되었다.

나는 감정 속에 잠기기보다

그 감정을 지켜보는 제3자의 시점으로 이탈해 있었다.


나의 메타구조, 그것은 나의 뇌가 만든 감옥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본다는 건 곧

한 걸음 덜 살아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카프카도

모두 이 끔찍한 이해의 저주를 앓았다.

사건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건을 구조로 보고,

감정을 정념으로 번역하며,

삶의 생생함을 이론의 그림자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살아내는 법을 가르치진 못했다.

그들은 다만,

‘사는 것을 너무 깊이 알아버린 자’의 고통을 남겼을 뿐이다.


원초적 인간은 고통을 느꼈다.

지금의 나는, 고통을 인식하는 자신을 또다시 고통스러워한다.

이중 고통.

인식의 이중구조.

이 메타인식은 나를 감정의 방 밖으로 내쫓는다.


나는 이제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 괴리를 안고 울게 된다.

그 울음은 순수하지 않다.

이미 ‘나는 지금 울고 있다’는 관찰이 끼어든

어쩌면 반쯤 깨진 감정이다.


이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도구에 지배당하고 있다.


왜 나는 ‘삶을 느끼는 일’을

‘삶을 인식하는 일’로 대체하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나는 내 존재마저 객관화된 사물처럼 분석하고,

자신의 내면을 마치 논문처럼 분해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성과 인식의 발달이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복잡한 뇌야말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근원일 수 있다.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이런 뇌, 이런 구조, 이런 인식을.

하지만 이 인식은 나를 나 자신과 갈라놓고

나를 삶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주는 동시에 언어가 되고, 사유가 되고, 문장이 된다.

고통의 깊이가 언어의 깊이로 바뀌는 그 역설 속에서

나는 어쩌면 단순히 살아가는 자들보다 더 절박하게 삶을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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