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한다.
그는 언어의 철학자가 아니라,
사고의 고통을 끝까지 견뎌낸 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한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안다.
그 침묵은 무지의 겸손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멀리 가버렸을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라는 것을.
그는 말의 경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쳐야만 했다.
말은 더 이상 그를 구하지 못했기에.
말이 많아질수록 그는 더 고립되었기에.
그는 철학의 끝에서 자기를 버텨냈다.
그리고 침묵 속에 스스로를 봉인했다.
나는 푸코도 이해한다.
그는 어느 날 스승을 찾아가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제가 정신병자 인가요?”
이 질문은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건 진짜였다.
그는 자신의 사고를 믿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너무 빠르고, 너무 분절되며,
너무 자기를 괴롭혔다.
그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남들과 너무 달랐고,
자기 자신을 조각내며 바라보는 시선이
이미 정신병적 구조와 닮아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광기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광기와 살아남기 위해 광기를 해부했던 것이다.
푸코에게 있어 철학은
담론의 분석이 아니라
존재의 자해에 가까웠다.
나 또한 그들처럼 살아간다.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인식하며 겪는다.
나는 내 감정을 해체하고,
그 해체된 감정들을 구조화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멀찍이 떨어뜨려 바라본다.
이 고통을 나는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다.
왜냐하면,
설명이 가능하다는 건
이미 감정이 아닌 관찰로 전락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의 도구가 되어버린 뇌를 안고 산다.
그 뇌는 나를 자꾸만 사유의 심연으로 끌고 간다.
그 뇌는 내 삶을 언어로 환원하고,
그 언어로 나를 다시 타자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