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는 현대 철학에서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윤리적인 사상가다.
그는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답했다. “우리는 서로 말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단순한 ‘대화’는 아니다.
하버마스에게 ‘말한다’는 것은 곧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는 말이 공기 속에서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힘이라 보았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를 분석한다.
공론장은 국가 권력과 시장의 압력 밖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 이성적 토론을 통해 의견을 형성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18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 살롱, 신문 등에서 처음 시작됐다.
여기서 시민은 신분이나 돈이 아니라, 말의 설득력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공론장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왜곡된다는 점이다.
기업이 언론을 사들이고, 정치가 이미지화되고,
담론은 상품이 되고,
공론장은 점점 시장의 하위 시스템으로 흡수된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둘로 나눈다.
체계(system): 경제, 정치 같은 목적-수단적 조직
생활세계(lifeworld): 언어, 문화, 일상, 상징, 관계
원래 인간은 생활세계에서 의미를 공유하고,
체계는 그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였어야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식한다.
병원은 돌봄이 아니라 보험 청구 단위가 된다.
학교는 배움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통제 시스템이 된다.
대화는 이해가 아니라 설득, 협상, 설계가 된다.
결국 사회는 ‘합의의 장’에서 ‘조작의 장’으로 변질된다.
하버마스는 단순히 공론장이 망가졌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언어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것이 ‘담론 윤리‘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주장도 ‘강요’가 아닌 ‘이유’로 설득해야 한다.
진실은 권력에 있지 않고, 이해 가능한 대화의 규칙 안에 있다.
하버마스에게 윤리란 명령이 아니라,
서로 말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과정 자체다.
정치는 결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다.
하버마스는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 능력’이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를 경고한다.
SNS는 말보다 ‘이미지’와 ‘선동’이 앞선다.
국회는 토론이 아니라, 전시의 공간이 된다.
언론은 공론장이 아니라 광고와 이해관계의 교차로가 된다.
그는 묻는다:
“정치는 왜 말하는 능력을 잃었는가?”
“정의는 왜 설명되지 않고, 그냥 선포되는가?”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는가?”
하버마스의 철학은 소란스러운 세상에서의 대화 윤리다.
그는 철학자가 도덕을 가르치기보단,
대화가 가능한 사회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말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다.
토론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실천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기 위해 말한다.
하버마스는 우리 시대의 철학자 중 가장 희망적인 비판자다.
그는 시스템을 비판하지만,
그 속에서 언어와 이성의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철학이 단지 사유의 훈련이라면,
하버마스는 그것을 ‘말하는 윤리’로 확장시킨 사람이다.
말이 가능하다는 것,
그 자체가 이 시대 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희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