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내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누구의 말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유보할 때 반복하는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마주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체계의 핵심 운영자였지만,
그는 거듭 주장했다.
“나는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아렌트는 거기서 괴물의 얼굴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너무도 ‘평범한 인간’의 사유 중단, 판단 유예,
그리고 무의식적인 ‘충성’이라는 이름의 복종을 보았다.
그 복종은 가슴을 치며 맹세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는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안락한 자리에의 안착이었다.
직장에서 우리는 매일 지시를 받고, 규칙에 따르며,
상사의 눈치, 조직의 분위기, 규율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심이 강한 직원”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충성은 언제부터 판단을 유보하는 미덕이 되었는가?
부당한 보고를 요구받을 때,
불필요한 야근이 미덕이 될 때,
조직의 방침이 사람을 해치고도 “우린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
많은 이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음에도,
“여기선 그렇게 안 해요.”
“이게 원래 그래요.”
라는 말로 스스로의 생각을 묶어둔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의 시작이다.
그리고 악은 이 무사유 위에서 꽃핀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아이히만의 공포는
그가 사디스트도, 이념 광신자도 아닌 ‘평범한 사무원’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는 스스로 질문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다.
대신, 체계와 상사, 규율에 “충성”했다.
이 충성은 정의에 대한 충성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가 요구하는 질서에 무비판적으로 자기를 일치시켰다.
오늘날의 직장 또한, 그 구조를 바꾸지 않고 유지되기만을 원할 때
생각하는 개인보다는 충직한 일원을 선호한다.
그렇게 비윤리는 체계 속 ‘정상적인 일’이 되고,
개인의 사유는 “팀워크에 어긋나는 행동”이 된다.
악은 그렇게, 내부의 ‘좋은 직원’들이 묵인함으로써 살아남는다.
아렌트의 철학은 윤리적 명령을 주기보다는,
생각하라는 윤리를 준다.
판단을 멈추지 말라는 명령이다.
당신이 보고 있는 지시가 타인을 해치고 있다면,
당신이 따르고 있는 체계가 누군가를 침묵시키고 있다면,
그곳에서 철수할 수 있는 용기.
“나는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철학이다.
충성은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유를 대체할 때,
그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복종이 아닌 깨어있는 충성,
규율이 아닌 판단,
체계가 아니라 정의에 봉사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말하지 않는다.
“항상 반항하라”고.
그녀는 다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라. 아무리 작은 행위라도, 생각 없이 행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