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에 대한 철학

by 신성규

하이데거는 철학사 전체를 ‘존재에 대한 망각’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존재”는 어떤 물건, 사람, 생각의 단순한 실존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존재자(존재하는 것)를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고, 사유하는가에 대한 근본 조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존재’를 인간이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묻지 않고, 그것이 ‘쓸모 있느냐’를 먼저 묻는다.

그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기술적 사고’라고 부른 인간의 근본적 전환점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전환으로 보았다.


기술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숲은 나무로, 나무는 목재로, 목재는 건축 자재로 본다.

인간은 노동력으로, 시간은 생산성으로, 대화는 네트워크로 환원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물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단지 ‘무엇에 쓸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종말’,

존재가 배제된 세계의 구조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Dasein, 즉 ‘현존재’,

존재를 묻는 유일한 존재로 정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존재-묻기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살아 있고, 작동하고, 반응하고, 기능하지만

깊이 묻고 응시하는 능력, 즉 사유의 본질은 자주 거세된다.


이 시대의 불안은 어쩌면 철학적이다.

우리는 존재를 잊었고,

그렇기에 자아를 잃었으며,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브랜딩’으로 자기를 찾는다.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지 않고,

시스템 안에서 자신을 최적화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질문한다.

“우리는 언제, 존재를 묻는 것을 그만두었는가?”


이 물음은 결국 ‘인간은 언제 인간이기를 멈췄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는 인간이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사용하는 시대가 왔다고 본다.


기술은 인간을 편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인간을 세계와 ‘관계맺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풍경은 사진으로 찍히기 위해 존재하고,

대화는 콘텐츠로 사용되며,

시간은 효율을 위해 조각난다.


이때 인간은 ‘존재자’들의 흐름 안에서 존재를 잊은 채 소비자, 사용자, 기능자로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실마리를 제시한다.


“시는, 사유보다 오래 산다.”


그는 ‘시적 사유’를 강조한다.

논리적·계산적 사고가 아니라, 세계를 열어두고 응시하고 기다리는 태도.

우리가 존재자에 빠지지 않고, 존재 자체를 경험하는 방식.

이것은 말 없는 고요, 산책, 응시, 침묵, 공포, 미학, 죽음의식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 시대의 인간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꼈는가?

‘왜 사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를 묻는 시간은 있었는가?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술문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쓰되, 기술에 쓰이지 말자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어떤 사물 앞에서 ‘이것은 무엇인가?’를 물을 것

인간 앞에서 ‘그는 누구인가?’를 느낄 것

자기 앞에서 ‘나는 존재하는가?’를 고요히 물을 것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유하지 않는 시대에,

사유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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