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도덕을 ’정언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것이다: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항상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
이 명령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소비하고, 거래하고, 이익을 따지는 모든 삶의 태도에 근본적인 반문을 던진다.
타인을 하나의 ‘기능’으로만 보는가, 아니면 독립적 존재로 보는가?
그것이 칸트적 인간 존엄의 기준이었다.
우리 시대는 칸트가 경고했던 바로 그 세계다.
모든 것은 교환된다. 관계조차 “가치”로 환산된다.
친구는 ‘인맥’이 되고
연인은 ‘투자 가치’가 되고
노동자는 ‘리소스’가 된다
사람은 기능을 가진 프로필이 되고,
그 프로필은 ‘쓸모’에 따라 서열화된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먼저 ‘직업’을 묻고,
그 다음 ‘연봉’을 따지며,
마지막에야 ‘인격’을 생각한다.
모두가 누군가의 수단이 되어 살아간다.
이런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엄’을 말할 수 있을까?
현대 자본주의는 능률을 우선시한다.
효율, 성과, 빠른 의사결정.
모든 것은 ‘최적화’를 위해 조정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도구화’된다.
고객을 ‘단위 소비자’로 보고
직원은 ‘성과 지표’로 환산되고
아이조차 ‘성공 가능성’으로 측정된다
칸트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오늘의 병리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덕적 저항이다.
그는 말한다:
“도덕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의무’에서 나온다.”
“어떤 결과를 위해 인간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는 목적이 아니다.
윤리는 브랜드 마케팅의 수단이 되었고,
도덕은 ‘이미지’로 관리된다.
심지어 ‘선한 이미지’조차 교환가치를 갖는다.
이 시대에서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예의 바르고 잘 웃는 사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칸트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좋은 사람이란, 단지 ‘타인을 존중하기에’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즉, 그 사람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 이득이 없어도 도와주는 것.
불편하더라도 침묵하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더라도 옳음을 선택하는 것.
하지만 우리는 이 기준을 잃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이 사람은 그 자체로 귀한 존재인가?”는 거의 묻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을 되묻는다
일을 할 때, 당신은 기계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인간관계에서도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조차 ‘유용한 인간인가?’로 평가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타인에게 수단으로 취급받는 고통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수단으로 대하는 걸 너무 쉽게 한다.
칸트의 철학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삶의 대부분을 해체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계, 직장, 소비, 판단, 그 모든 것들이 수단-목적 구조에 얼마나 깊이 물들었는지를 말이다.
칸트의 윤리는 단호하다.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다.
존중은 전략이 아니다.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그가 말한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란,
누군가를 단지 쓸모로 판단하지 않고
실수를 했어도 존재 자체로 존중하며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의 내면과 고유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칸트적인 순간은
도움이 되지 않아도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줄 때
당신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정의를 선택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양심대로 행동할 때
그 순간,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윤리적인 존재로
존엄을 회복한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