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성이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기계다.”
욕망은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에서 경계하거나 억제해야 할 감정이었다.
플라톤에게 욕망은 이성의 질서를 위협하는 비이성적 충동이었고,
기독교에서는 욕망이 죄로 가는 입구였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조차도, 욕망은
무의식의 충동과 금기의 대립 속에서 억압되고 병리화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모든 전통을 뒤엎는다.
그들에게 욕망은 억압되어야 할 병이 아니라, 창조의 힘이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반응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고 연결하는 기계다.
욕망은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욕망은 체계의 틈을 찢고 탈주하려는 운동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묻는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체제를 욕망할까?
예컨대, 왜 어떤 노동자는 자신의 착취자를 찬양할까?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억누르는 권위적 제도를 옹호할까?
그들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억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억압은 욕망을 통해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즉, 욕망은 사회 기계 속에서 조직되고,
욕망은 체계의 기호를 내면화하며,
스스로 억압을 욕망하도록 포획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한 “욕망의 코드화“이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상품과 동일시하며,
정신분석은 욕망을 오이디푸스적 가족 드라마로 환원시킨다.
욕망은 끊임없이 제도화되고,
그 제도는 욕망을 다시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획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욕망을 항상 ‘아버지’, ‘어머니’, ‘아이’라는
핵가족 삼각형 안에 가두었다.
이 구조는 곧 ‘누구를 욕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권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정신분석의 파시즘이라 부른다.
욕망을 특정 가족 구조에 환원시키는 것.
그것은 개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욕망을 통제하는 정치적 장치다.
자본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무한한 욕망의 흐름을 ‘소유’와 ‘상품’이라는 코드로 재배치한다.
욕망은 소비와 계급, 계층, 권력으로 나뉘고,
이 체계 안에서 욕망은 오히려
더 욕망할수록 더 통제되는 구조에 귀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언한다.
“욕망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욕망은 하나의 기계다.”
욕망은 신체와 사물, 생각과 대상, 자연과 기술을 연결하는
연쇄적 생산의 에너지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감정도 아니다.
욕망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의 힘이다.
이때 욕망은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흐름이 만나는 장이다.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고,
사유는 이 기계의 연결을 해석하는
또 다른 기계다.
이 욕망은 기존 체계에 ‘적응’하지 않고,
항상 탈주를 시도한다.
욕망은 체계가 닫아놓은 문을 밀고 나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탈주선이라 부른다.
탈주선은 억압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생성의 선이다.
욕망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다.
욕망은 오늘의 삶에도 흐르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원한다.
어떤 이는 성별 이분법을 거부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어떤 이는 도시를 떠나 자급의 삶을 시작한다.
어떤 이는 SNS의 이미지 산업을 탈주해 글을 쓴다.
이 모든 것이 욕망의 탈주선이다.
그들은 단지 거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만든 사람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은 언제나
정치적이며 창조적인 실천이다.
욕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이며,
체계는 항상 그것을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욕망은 절대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욕망은 언제나
그 체계의 균열에서, 언어의 틈에서, 삶의 모서리에서
다시 흐르고, 탈주하고, 연결한다.
그러므로 묻는다:
우리는 우리 욕망의 주인인가?
아니면 체계가 만든 욕망을 살아가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욕망하라.
그리고 욕망을 욕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