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상사는 후배의 퇴사 이유를 “요즘 애들은 유난”이라 일축했다.
그 말 한마디는 당연한 듯 웃음 속에 묻혔고, 후배의 불면과 우울, 버티다 터진 눈물이 부재처럼 취급되었다.
현대의 조직, 정치, 미디어는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서사 없이” 넘긴다.
사람은 존재하지만, 얼굴은 없다.
우리는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거나 무시하거나, 시스템 속에 녹여버린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했다.
윤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시작된다고.
그 얼굴은 “내 앞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나에게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존재의 고통은 나의 책임을 호출한다.
타인은 내가 규정할 수 없는 타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책임적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얼굴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병원에서, 관공서에서, 사무실에서, SNS의 댓글창에서, 우리는 타인을 숫자로, 성과로, 데이터로 처리한다.
사람이 시스템의 일부로 환원될 때, 윤리는 기능성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기능으로만 보는 순간, 고통은 설득되지 않으면 무시해도 되는 것이 된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윤리는 자유보다 앞선다.”
즉,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먼저, 타인의 얼굴은 나를 향해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자본주의, 오늘의 정치, 오늘의 조직은 이 윤리를 체계적으로 제거한다.
성과는 설명되지 않은 희생을 요구하고, 결정은 누구의 고통도 직면하지 않으며,
윤리는 “설명해야 들을 수 있는” 상태로 격하된다.
하지만 그 얼굴은 말없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윤리를 호소한다.
타인의 고통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멈춤의 대상이다.
고통은 이해 이전에, 우선적으로 책임으로서 나에게 도달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진심으로 멈출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때, 윤리는 철학이 아니라, 이미 실종된 감각의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