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머리글
“그림쟁이의 남편”이란 주제가 돌연 떠올랐고, 이후 그로부터 연상된 이야기의 파편들이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금방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전혀 심란한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즐기듯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나의 처지와 일상이 투영된 이 주제는 점점 흥미로운 대상으로 인식되는 듯했다. 뜻밖의 전개에 기대 섞인 흥분과 수줍은 기특함 마저 느껴졌으며, 이러한 흐름이 지루한 삶에 단비가 되어주길 소망했다.
이 주제가 어찌하여 내게 다가올 수 있었던가, 그 뚜렷한 절차에 관한 설명은 무슨 수로도 불가능하다. 생각이란 일상의 감각들이 어디선가 숙성되어 불현듯 우연처럼, 불친절한 매뉴얼조차 없이 툭 던져지기 마련이니까. 하여 어떤 이야기들로 진화될 수 있을지 고찰해 볼 따름이다. 그림쟁이는 분명 나의 아내이며, 남편은 바로 나 자신이다. 또 한 가지, 그림이란 소재를 포함하고 있으니, 우리 부부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될 듯하다. 남편인 내게 이런 주제가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그림쟁이 아내에 의해 알지도 못하는 어떤 곳에 정처 없이 휘말려든 억울함, 아니면 뜻밖의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딱히 지정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 예상을 해본다. 그저 이야기를 쓰는 화자가 남편 쪽이라는 사실만 확실할 뿐이다. 나는 그저 그런 남편일 뿐 그림에 관한 재주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감성이나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평범한 일반 시민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아내는 '그림쟁이'인가. 가벼워 보이는 이 지칭에 대해서 되려 가볍지 않은 의미들이 있음을 나는 인지한다. 내가 아는 나의 아내는, 그림 외에 이렇다 할 타고난 능력도 없지만 유독 그 행위에서 삶의 가치를 느끼는 듯하다. 그림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함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미워하며, 그 속에서 언제든지 고통받으면서도 간혹 새어 나오는 단출한 환희조차 귀중한 보석쯤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그림쟁이 아내는 깊은 내면의 고통과 그를 통한 순수한 갈망을 품고 살아가며, 남편은 그저 그 옆에 있다.
이러한 그림쟁이에 대한 정의가 과장되고 장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 가엾은 그림쟁이가 자기 앞에 실존한다면, 뿐만 아니라 상당히 밀착해 있다면 어떨는지 상상해 보자. 그녀는 우울, 예민, 감정기복 등을 수시로 표출한다, 아무 예고도 없이. 그녀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높은 확률로 고난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부부는 여러 면에서 극명하게 반대 성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지속가능한 제휴 관계이길 바라며 나와 그림쟁이 아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탐구하고자 한다. 흩어진 허상들이 차츰 친숙해져 뚜렷하게 변모하길, 그리하여 최후에 그들이 어떤 결말을 내놓을지, 불분명한 희망과 기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부부의 11년 연애기간과 7년 결혼생활 동안 차곡차곡 쌓인,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 매우 진부한 러브 스토리를 늘어놓을 예정은 전혀 없음을 밝히고 싶다. 아내를 향해 품었던 과거 어느 시점의 나의 사랑이, 젊은 베르터가 로테를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다 못해 고통에 시들어 가던 그러한 감정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어떠했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과연 무엇을 감내해야 할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기억이 희미할 뿐 분명 그것이 베르터만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확실히 언급해두어야 하겠다, 로테의 사정도 있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