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코트에 선 선수들은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을 연상케 합니다. 사랑과 게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선수들은 규칙을 따릅니다. 상대 혹은 관객에게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이면 벌점을 받습니다. 무득점을 뜻하는 단어가 러브(love)라는 사실도 재미있지요? (숫자 0과 비슷한 달걀을 뜻하는 프랑스어 l'oeuf가 영어의 러브로 변했다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강한 스트로크와 리턴으로 상대를 몰아붙일 때도 필요하지만, 상대가 받아치기 어려운 공을 보내면 실례입니다. 본래 테니스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치기 쉬운 공을 주어 오랫동안 랠리를 즐기기 위한 스포츠이니까요. 중요한 점은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남녀 관계 역시 비슷하지요. “테니스는 관계야.” 주인공 타시(젠데이아 콜먼)가 남자들에게 건넨 조언입니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현시점인 2019년과 이야기의 출발점인 2006년,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시간대를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장면 전환은 코트를 날아다니는 테니스공처럼 예상하기 힘들고 빠르게 이어집니다. 땀과 열기, 함성이 한데 섞여 이글거리는 테니스 코트에서 영화가 시작합니다. 결승전에 선 두 명의 선수는 패트릭(조시 오코너)과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입니다. 관중석에 앉은 타시는 초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접전을 지켜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세 사람. 이들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요?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테니스를 해온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시 오코너)입니다. 주니어 복식 대회에서 짝을 이뤄 우승을 휩쓴 사이이기도 합니다. 13년이 지난 현재, 두 사람의 처지는 사뭇 다릅니다. 아트는 이미 윔블던과 US 오픈 등 메이저 대회를 휩쓴 스타입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챌린저 투어(메이저 대회를 위한 관문 역할을 하는 테니스 시합)에 도전했다지만, 다른 선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실력을 갖췄습니다. 어릴 때 좋은 기량을 보여주었던 패트릭은 챌린저 투어를 전전하는 처지입니다. 데이트 앱에서 만난 여성에게 당장 머물 곳을 의탁할 정도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시간은 그들이 처음 만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트와 패트릭은 주니어 대회에 복식으로 출전해 우승컵을 거머쥡니다. 두 사람은 여자 테니스계의 신성 타시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아트와 패트릭은 타시가 등장한 포스터 앞에서 그녀의 앞날에 꽃길이 펼쳐졌으리라고 예감합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와의 광고 계약과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 설립이 타시의 코앞에 있는 듯합니다.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여타 스포츠 종목과 달리 테니스 경기에서는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셀레나 윌리엄스와 마리아 샤라포바 같은 여성 테니스 선수의 이름에 우리가 익숙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타시가 테니스란 종목을 선택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날 밤, 아트와 패트릭이 머무는 방에 타시가 찾아오자 두 남자는 긴장합니다. 관계를 주도하는 인물은 타시입니다.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특유의 관능적이지만 결코 우아함을 잃지 않는 에로티시즘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어느샌가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은 아트와 패트릭입니다. 두 남자 사이의 섹슈얼러티에 대해서 영화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상 아트와 패트릭은 고대 그리스 남성들처럼 스포츠를 통해,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인물처럼 비칩니다. 우승한 뒤 껴안고 뒹구는 그들의 모습은 연인이라기보다 서로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강아지 같습니다. 두 남자를 향한 타시의 시선 역시 관음증적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현상을 대하는 탐구자의 눈길 같습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아트와 타시는 함께 스탠퍼드로 진학하고 패트릭은 프로로 진출합니다. 사립학교 출신의 부잣집 도련님인 아트와 패트릭과 달리 타시는 일찌감치 철이 들었습니다. 타시는 패트릭과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사 무사태평한 패트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패트릭 역시 코치처럼 구는 타시에게 화가 납니다. 두 사람이 다툰 날, 하필 타시는 무릎이 꺾이는 큰 부상을 입습니다. 패트릭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트와 타시는 그에게 날 선 반응을 보입니다. 세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정도 타시의 무릎처럼 조각납니다. 선수 생활을 포기한 그녀에게 아트가 먼저 손을 내밉니다. 이제 아트의 코치이자 부인이 된 타시는 자신의 욕망을 아트를 통해 실현하려 합니다.
결승을 앞둔 아트의 표정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구가하는 아이의 표정이 언뜻 스칩니다. 그러나 아트를 향한 타시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경기를 마치면 승패와 상관없이 은퇴하겠다는 아트의 말에 타시는 실망 합니다. 그러나 아트는 예전처럼 테니스를 즐길 수 없습니다. 승부의 세계가 주는 중압감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시합에서 마주친 패트릭에게 아트와 타시 부부는 냉소를 보냅니다. 학창 시절 ‘모든 남성의 이상형’인 타시는 주변 남성을 팬클럽의 일원으로 여길 만큼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타시에게 무릎 꿇기는커녕, 그녀와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패트릭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잃을 것이 많은 아트에 비해 여전히 패트릭은 테니스란 경기가 주는 매력에 푹 빠져있습니다. 철딱서니 없고 불성실한 태도 탓에 무명 선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요. 사우나에서 마주친 아트와 패트릭 사이에 긴장감이 감돕니다. 아트는 패트릭에게 “너는 아직 어린아이로 남아있다며” 차갑게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트 본인은 어떨까요? 패트릭이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코트에 선다면, 아트의 마음은 이미 노쇠했습니다. 청춘의 패기를 잃기로는 타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트는 승부의 세계를 떠나고 싶지만, 타시는 아트가 계속 그녀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타시는 패트릭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자신과 잠자리를 하는 대가로 시합에서 아트에게 패배할 것을 부탁합니다. 스포츠 정신을 저버린 야비한 제안이라고요? 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타시입니다. 남편이 아닌 남성을 향하는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 곱씹거나, 반성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추구하는 욕망은 언제나 다른 방향이라는 사실을 타시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경기에서 지면 아트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발언은 진심입니다. 부부 생활은 권태기에 접어들었고, 타시는 아트에게 더는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패트릭과 한 약속으로 인해 타시는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타시는 아트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패트릭과 동침했습니다. 한편으로 아트가 우승하면 타시로서는 그와 헤어지지 않을 명분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타시의 마음 깊숙이 숨겨진 동기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관계란 그만큼 복잡하고 모순된 여러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부 조작으로 빚어낸 우승이 과연 그들 부부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녀의 계획대로 아트가 우승한다면 타시는 아트의 실력에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 패트릭에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존경심마저 잃게 됩니다. 반대로 패트릭이 약속을 어기고 경기에서 우승한다면 타시는 아트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아트가 제 실력으로 이긴다고 해도 타시로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관중석에 앉아있던 타시의 복잡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타시가 패트릭과 잠자리를 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저 첫사랑과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화면은 다시 2019년 챌린저 경기의 결승전으로 돌아갑니다. 팽팽하게 경기가 흘러가는데 갑자기 패트릭이 아트를 도발합니다. 타시와의 동침을 암시하는,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사인을 보낸 것이지요. 그의 도발에 넘어가기도 잠깐, 아트 역시 패트릭에게 같은 사인을 보냅니다. 타시와 수없이 많은 밤을 보낸 사람은 패트릭이 아닌 아트라는 경고이지요.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진짜’ 경기가 시작됩니다. 코트는 땀과 욕망, 호르몬이 한 데 섞여 타오르는 도가니로 변합니다. 아트는 이제 무기력한 고참 선수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그의 가슴속에 진정한 활기와 패기가 용솟음칩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글 첫머리에서 테니스와 사랑의 유사성을 말씀드렸습니다. 후반 10 여분 간, 테니스 코트는 거대한 침대로 변모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그들과 함께 뒹구는 느낌을 맛봅니다. 아트와 패트릭의 피부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카메라가 핥듯이 클로즈업합니다. 로우 앵글(low angle)로 잡은 두 남성의 점프 장면은 고대 그리스의 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타시 역시 그들의 정열에 전염됩니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번 영화에서도 영상 언어로 불필요한 서사를 대신합니다. 천천히 흐르는 땀방울, 두 사람이 내지르는 교성, 웃음소리, 관객이 내지르는 함성이 연기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래서 누가 이겼냐고요?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승패 따위 중요하지 않습니다. “come on!"을 외치며 사랑하는 두 남자를 동시에 응원하는 타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시 덩컨은 테니스 실력뿐 아니라 미모와 매력으로도 돋보이는 스타입니다. 세 사람 중 누구보다도 테니스를 사랑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 관해 잘 알고 욕망에 충실한 악녀입니다. 그녀를 두고 아트와 패트릭이 승부를 펼칠 때도, 그녀는 남성의 전리품 역할 따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욕망을 한껏 부추겨 삼각관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꼭짓점을 점할 생각만 하지요. 질투에 불타는 아트가 ‘패트릭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며 이간질할 때도 사랑받을 생각 따위 없다고 못 박습니다. 사랑받기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이며 타시는 늘 주체의 위치에 있기를 원합니다.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은 타시는 여전히 테니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코치 생활을 거쳐 아트와 결혼한 이유 역시 아트를 통해 포기를 모르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타시와 아트의 결혼생활은 바람직하지 않은 공생으로 바뀌어 갑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극성 엄마와 그런 엄마를 만족시키려는 아들 사이 같습니다. 마침내 패트릭과 아트가 애초의 마음을 되찾자, 타시 역시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아트와 패트릭을 향한 타시의 포효는 왜 그녀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해서는 안 되느냐는 도발적인 질문과도 같습니다. 인생과 사랑, 심지어 스포츠에서조차 규칙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Her games, her rulles(그녀의 게임, 그녀의 규칙)"이라는 영화의 홍보 문구는 타시라는 악녀에게 딱 들어맞는 표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