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세 살 배기 애엄마가 수능에 도전하다, 아무도 모르게!
어느 가을이었다. 나는 세살 아기가 탄 유모차를 끌고 단풍잎이 늘어선 길을 걷고 있었다. 저마다 고운 빛이 물든 낙엽을 밟으며 가을을 만끽했던가? 그럴리가. 처음 가 본 동네에서 울퉁불퉁한 도로와 사투하며 급히 사진관을 찾고 있었다. 지금 당장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2시간 후에 마감되는 수능 원서 접수에 실패한다. 증명사진 사이즈를 잘못 가져간 탓에, 접수장에서 퇴짜를 맞고 나오는 길이었다. 초췌한 맨얼굴 위에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달라붙고, 오래된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지금 당장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헤매며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작은 사진관을 겨우 찾았고, 늘 그렇듯 귀인은 인생의 중요한 타이밍에 기적처럼 나타난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진관 사장님이 내가 잘못 가져온 사진을 슉슉 조작하더니 수능 접수용으로 인화해 주셨다. 그것도 불과 십여분 만에. 감사합니다! 귀인.. 아니 사장님! 허리를 굽혀 진심의 인사를 전하고 유모차를 밀어 다시 원서 접수장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수능 접수 마감 1시간을 남기고 수능 원서 접수를 마쳤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세 살 아이를 키우는 애엄마였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그것도 세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애엄마가, 수능시험을 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도, 흔하지도 않았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데다, 일단 이 나이에 수능 본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하여 나는 수능 접수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에게조차도.
문제는 수능날이었다. 평범한 육아의 나날들 속에서 수능날 이른 아침부터 집 밖에 나갈 구실을 만들어야 했으니, 나의 선택은.. 하얀 거짓말. 남편에게는 결혼 전에 하던 일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미팅이, 오전에, 서울에서 잡혔고, 어쩌면 그 미팅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고 일러두었다.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같이 집에서 나가 서울에 가야 한다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하지만 삶은 늘 그렇듯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포항에서 지진이 났다.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2017년 11월 15일, 수능 하루 전날. 수능이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바로 그날인 것이다. 전국은 포항 지진 뉴스로 떠들썩했다. 이를 어떡하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포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 처지 또한 과히 좋은 건 아니었다. 수능날, 오로지 그날 하루를 위해 온 집안에 미리 거짓 스케줄을 만들어 놓았는데 수능이 미뤄지다니! 학교 수시고사도 아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미뤄지다니요!
하지만 어쩌랴. 삶이 주는 서프라이즈란 그저 겸허히 받아들일 뿐, 별 다른 수가 없다. 하여 원래대로라면 수능이 치러져야 했던 날, 나는 서울에 잘 다녀오겠다며 남편에게 미소로 인사하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와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신세가 어찌나 처량하던지. 나이 서른 여섯 수험생이 갈 곳이 어디있겠는가. 가까운 시립도서관을 검색해서 버스를 타고 갔다. 점심으로 김밥천국에서 만둣국을 먹었고, 하루 종일 수능 문제집을 풀다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갔다.
"자기야~ 오늘 미팅이 아주 좋았어. 아무래도 한번 더 만나서 더 디테일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다음 주에 또 한 번 미팅하기로 했어!"
능청이 사람이라면 그게 바로 나였을 거다. 다행히, 남편은 그 말을 믿었다. 아주 철석같이.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진짜 수능시험일. 그날도 남편에게 서울에 잘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했다. 마치 큰 바다에 나가 엄청난 대어라도 잡아올 것마냥 아주 당당하게.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 동네 빠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와 음료를 하나 샀다. 수험장 교문 앞에 가니 교복을 입은 앳띈 얼굴들이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떨리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옛 생각이 났다. 내 고3시절은 어땠었나, 많이 떨렸던가.. 생각하며 수험장 교문을 넘어 서고 있는데.. 그때였다. 누가 날 다급히 불렀다.
"거기, 저기요~!! 수험생 아니죠?!"
학교 관계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치, 딱 봐도 수험생처럼 안생겼겠지..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목소리는 알아서 기어들어갔다. 그래도 할말은 해야지.
"아니요. 수험생 맞는데요..."
아, 나는 정말 당당하지 못했다. 아니 정말 이 나이에 무슨 수능이란 말인가!!
교실에 감독관 선생님이 하나 둘 들어왔다. 청년의 기운이 아직 광대에 봉긋이 남아 청량한 인상이었다.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어린 나이로 보였다. 아, 맞다! 휴대폰은.. 꺼야했다. 그럼 남편이랑 연락을 못할텐데.. 거기까지 대비하지 못한 나는 순간 당황했다. 에이 모르겠다.. 나를 아는 모두가, 특히 남편이, 하루종일 바빠서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휴대폰 전원을 껐다. 수험생 본인 확인을 위한 신분증 확인이 시작되었다. 2018년 대입 수능 시험장에 01학번이 앉아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장면인가! 감독관이 내 옆을 스칠 때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매 교시가 시작되고 감독관이 수험표 확인을 하며 신분증을 확인할 때마다 그랬다. 그러나 순간은 순간일 뿐, 시간은 갔다. 다행히 '수험생처럼 안 생긴 수험생'은 그날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켜니, 부재중 전화가 무려 서른 통이 넘게 찍혀있었다. 발신자는 남편에 시어머니까지 있었다. 아, 이를 어쩌지.. 잠시 고민하다가, 태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생존신고를 했다.
"어머~ 어머님! 제가 하루종일 휴대폰이 '비행기 모드'가 되어 있었는지 몰랐지 뭐예요~ 오늘 날씨가 너~무 추워서 계속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저도 모르게 제 손가락이 비행기 모드를 눌렀었나 봐요~ 호호호~ 많이 걱정하셨죠~ 저 잘 있어요~ 호호호~"
이 정도면 연기에 도전해볼 걸 그랬나. 남편은 그날 나와 하루 종일 연락이 닿지 않아 동동거리다 하마터면 실종신고까지 할 뻔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편은 전혀 몰랐다. 내가 수능을 보고 왔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