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육아, 출산 후 뒤늦게 수능에 다시 도전한 이유
"지금은 서로 좋아서 애도 낳고 살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잖아~ 뭐 이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혼할 줄 알고 결혼하겠어? 나도 내 경제력을 가져서 이혼할 순간이 되면 멋있게 이혼할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었어!"
주변에서 다른 일 찾아보면 되지 왜 굳이 그 나이에 학교까지 다시 다니냐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이말은 50% 정도는 사실이다. 사람 마음은 늘 한결같지 않다. 그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목도해온 것이었다. 결혼이 검은 머리 파뿌리를 확정하는 건 아니었고,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만에 하나 우리 부부가 어떠한 이유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을 때, 내가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주저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그럼 이만 끝내!라고 당차게 뒤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 관계가 좋지 않느냐, 그렇지도 않다. 여느 평범한 가정처럼 삶의 파트너로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 불안이 많은 사람. 그 불안 때문에 나는 온전히 나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굉장한 성취지향적 인간이라 난 내가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 하는 일 등으로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여야만 비로소 나일 수 있는, 그만큼 빈약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데, 나의 불안을 채우고 있는 것 중 가장 두려운 것 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중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것 하나는.. 지금껏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가난이었다. 아주 명료하다. 나이 서른 여섯, 세살 아이 엄마가 굳이 수능을 다시 본 이유의 나머지 50%는, 가난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나의 학창 시절은 가난했다. 가난해서 도시락에 마른 멸치 몇개와 고추장을 반찬으로 싸간 적도 있다. 집에 쌀이 없어 엄마가 울었다는 고백을 들은 적도 있다. 학창시절 내내,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중, 돈 드는 일을 욕심내어 해본 적이 없다. 이사를 갈 때마다 집이 작고 허름해지는 게, 문드러진 양파 같다고 생각했다.
벗기면 벗길수록 작아지고 작아지고, 끝내는 손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양파.
물론 지금은 부모님의 숭고한 노력으로 형편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났을 때의 일이기에 내게 가난은 손끝에 베어 없어지지 않는 독한 양파 냄새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 속 저 밑바닥에서 잔불처럼 타닥타닥 존재하여 휘이하고 잔바람이라도 불면 기다렸다는 듯이 기세를 몰아 활활 불타오를 수 있는 불안이었다.
명퇴, 구조조정, 사고, 이혼, 질병, 사망.. 이 모든 것이 내 불안의 키워드였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불안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언제라도 침입할 수 있는 가난의 방어자는 오롯이 남편의 것이었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였다. 남편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다만 스스로를 믿을 수 있어야 살 수 있는,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내가 경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그 사실이 나를 불안의 늪으로 자꾸만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우울이 몰려왔다.
그래서, 내 가난은 내가 막겠다.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나의 불안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자 나를 움직이게 한 힘. 서른 여섯에 수능이란 걸 보게 한 나의 추진력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