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운명!
내 스스로 가난에 대항하는 방법, 경제적 자립의 방법이 처음부터 수능은 아니었다. 먼저는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학창시절 내내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기에 나는 대학교 졸업 전 방송국 막내 작가로 들어갔다. 햇수로 10년동안 방송작가로 일하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을 따라 전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임신, 출산, 육아가 이어지면서 경력단절자가 되었다. 나는 엄마이자 주부로 사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애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적당한 직업군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드문드문 나오는 공공기관 홍보직이나, 문화재단의 소일거리들, 괜찮은 조건의 광고홍보업체 채용공고에 지원해 면접을 보았지만, 애엄마라는 핸디캡과 적지 않은 나이, 능력있고 젊은 친구들은 지난 10년 경력의 나를 손쉽게 이겼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시험을 봐서 얻을 수 있는 직업군을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엔 9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공인중개사, 계리사 등 각종 자격증을 알아보았고 나중엔 면허를 주는 대학까지 뒤져보았다.
면허를 주되, 내 능력으로 도달 가능할 것 같은 학과. 열심히 네이버 검색창에 '면허주는 학과'를 검색한 결과,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전국에 경희대, 우석대, 원광대 이렇게 딱 세 학교가 있고, 신입생 정원은 각 학교마다 40명, 전국 120명에 불과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메디컬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쟁률이 높지 않은 학과. 바로 약학대학에 소속된 한약학과였다. 내가 전주에 살게 되었으니, 세 학교 중 무려 두군데가 전주 인근에 있다는 것은 하늘이 주는 기회 같았다. 그런데, 한약학과는 뭐고 한약사는 뭐야? 그때부터 한약사란 직업에 대해 온 인터넷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한약사는 한약 전문 약사다.
약학대학 한약학과를 졸업하고 한약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허다.
약사가 의사 처방전은 받는 것처럼 한약사는 한의사 처방전을 받을 수 있고
약국개설권, 한약제제, 한약, 일반의약품을 다룰 수 있다.
이 직업은 국가에서 한방의약분업을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20여년이 지나도록 여태 한방의약분업이 되지 않은 관계로 억울함이 많은 직종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한의사 처방전은 하나의 직능일 뿐 실제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일반의약품 약국이나 한약전문약국, 한방병원, 원외탕전원, 제약회사, 공무직 등에서 근무한다.
그래? 한방병원이나 제약회사에서 일 할 수 있고, 약국에서 근무할 수 있는데, 약국을 개설할 수도 있다고?
이정도면 괜찮다. 4년 동안 다시 공부를 해야했지만, 면허를 따면 평생 직업이 생기는 것이므로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목표는 너다. 한약학과로 정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입시 준비다.
달력을 보았더니 아직 5월이었다. 수능은 11월이었으므로, 내게 약 6개월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불가능한걸까. 아니야, 가능할지도 몰라. 아니야, 역시 무리일까.
아니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할 순 없잖아.
마음 속 저울이 요동쳤다. 자신감이 생겼다 사라졌다 왔다갔다 했다.
그래도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 아무것도 안하는 것 보다야. 그래. 뭐라도 해보자. 안돼도 좋아. 이런 마음으로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안돼도 좋아. 진짜로.
우선 필요한 책을 사기로 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뒤 동네 서점에 갔다.
가만보자, 십여년 전 내가 고3 시절에 뭘 보고 수능 공부를 했더라?
참고서와 문제집의 표지들은 익숙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문제집은 EBS 시리즈와 3개년 기출문제!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아는 걸로 시작하기로 했다. 여전히 표지가 친숙한 EBS 문제집 몇권과 기출문제집을 샀다. 다음은 독서실 등록이다. 요즘 애들은 독서실 아니고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한다지만 육아하는 주부에게 기동력은 생명! 멀리 갈 것 없이 아파트 단지 독서실을 선택했다. 한달 이용료가 몇천원이었으니, 사실 다른 걸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나의 외로운 공부는 시작되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주섬주섬 책을 챙겨 아파트 지하 독서실에 갔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스마트폰의 유혹! 공부 좀 할라고 하면 갑자기 살 것도 생각나고, 궁금한 것도 생각나고, 그러면 공부 하다 말고 인터넷 서치하고, 또 하다 말고 뭐 하나 사고. 나의 찐 고3 시절에 스마트폰이 없었던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그렇게 핸드폰과 사투하며 문제집을 풀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 올라가 후다닥 밥을 먹고 돌아와 아이가 하원하기 전까지 공부하는 일상을 보냈다. 나의 이러한 일상은 조금 창피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비밀이 되어야 했으므로, 남편이 올 때쯤엔 공부한 흔적을 펜트리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나만의 펜트리 비밀공간. 거기엔 나와 펜트리가 지켜야할 비밀의 책들이 몇달간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