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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안녕 Oct 19. 2023

그림자의 시각

  너를 처음 본 것은 아침 출근 길,빽빽한 만원버스에서였다. 좀처럼 틈이라는 없는 숨이 막힐 듯한 버스 안, 꽉 막힌 도로와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버스에서 시간을 때우는 방법은 별다른 감흥 없는 음악을 듣는 것 뿐이다. 꼭 한번, 다리를 지날 때 만큼은 탁 트인 한강을 조망하며 그 날의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너는 나와 같은 정류소에 내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 버스를 탔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내가 그 버스를 타기 전부터 이용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지도…  하지만 우연히 네가 앉은 좌석 앞에 서게 된 날 이후 매일 아침 나의 눈은 자연스레 널 찾았다.  단정하게 귀 뒤로 넘긴 생머리, 얇은 귓불에는 반짝이는 큐빅을 물고 있는 작은 새가 달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너는 동화 같이 순수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쩌면 단지 그 작은 새 때문에 너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긴건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3 개월이 지날 무렵이나 우리는 타인처럼 지냈다. 아직 11 월 초입이었지만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시무룩한 날씨였다.  추위에 한껏 외투 속으로 움츠러든 채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에 너도 바삐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날 만큼은 왠지 너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기분이 들었던 나, 그 때 내가 어디서 났을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넌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기억 속에서 잊었을까.

   ooo 영어, 네가 들어간 곳은 꽤나 유명한 대형 영어학원이었다. 너는 작고 여린 외모와 달리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인 듯 했다. 냉철하고 무서운 선생님일까? 아니면 친구처럼 다정한 선생님일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곧장 네가 있는 학원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에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놀랍기는 했으나 현재 나의 주제에 별다른 자극이 되지는 못했다.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빨간 뿔테 안경을 낀 여자의 얼굴 뒤로 자꾸만 눈길이 향했다. 벽면에 붙은 학원 선생들의 얼굴과 이력을 눈으로 만지듯 훑다 너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내 얼굴에 비친 기쁨을 그녀가 눈치 챌까 헛기침을 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네 얼굴 밑에는 너의 이름과 이력, 강의시간이 붙어있었고 아쉽게도 너는 중고등학교 반만 맡고 있었다. 애석하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얕은 실력으로 네게 영어를 배우는 모습, 왠만큼도 안되는 수준에 실망하며 나를 어떻게 개조해야 좋을지 한숨 쉴 네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렇게 된다면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빌미로 친해질 계기는 만들 수 있겠지만 추후에는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너를 하루에 두 번 보게 된 것이다. 그걸로 족했다. 


  어느덧 내 일과는 너로 채워졌다. 일하는 시간마저도 끝나고 널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었으니. 

  너는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바다가 접해 있는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몰타라는 머나먼 타국의 섬으로 건너가 당차게도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낯선 나라에서 조용한 그림자처럼 남들의 시선 밖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름 모를 부부의 집에서는  갓난아기의 대소변을 치우고, 남들은 거나하게 취하는 시간 바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다고 했다. 

  너는 매 순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했다. 나는 동화 같은 네가 지고 있을 많은 짐들이 안쓰러웠지만 그저 바라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너는 여러모로 특별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너의 면모를 알아가며 매일이 채워졌다. 알고 보면 나는 너에 대하여 많이 아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너라는 눈앞의 실체와 함께 있는 순간들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순조롭게 두 번째 가을을 맞았다. 

  

   나의 영어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네게는 남자가 생겼다. 기생 오라비 같이 생긴 놈.  그런데도 나는 네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학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마주칠 때면 그 남자는 언제고 그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와 이야기 하는 네 모습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나는 그 남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너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작스레 내 내앞에서 네가 자취를 감췄다. 

  버스, 학원, 집 앞, 그 어디서도 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널 다시 마주한 곳은 학원이 자리한 길 끝에 위치한 00 경찰서에서였다. 넌 조금 운 듯한 얼굴이었다. 옆에는 그 남자도 함께 있었다. 

  네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보았다. 날 보는 너의 경멸의 시선, 그리고 너는 절규하듯 외쳤다. “나 저 남자 몰라요. 저런 사람 처음봐요.” 

 

   그토록 바랬던 너와 첫 대면의 순간에 나는 고개 들어 너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나는 너와 그토록 많은 시간을 공유했는데, 그저 우리의 감정이 조금 달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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