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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카소 Oct 04. 2022

컬러 그들이 사는 세상

어린 시절 미술 도구를 사거나 선물 받을 기회가 있으면, 문구점에서 색이 가장 많은 것을 골랐다. 72색의 크레파스는 다른 친구들의 24색 크레파스에 존재하지 않는 에메랄드 녹색이나 상아색, 연보라색과 같이 예쁜 색이 가득했다. 보고만 있어도 황홀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크릴 또는 유화 물감, 오일 파스텔  미술 재료를  세트로 사야 되면 가장 많은 색을 골랐다.  그림 안에서 다양한 색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선택할  있는 색의 범위를 최대한 넓게 하고 싶었다.

요즘은 디지털 드로잉으로 주로 작업한다. 그림 앱에서 제공하는 컬러 팔레트는  가지 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색조와 명도, 채도에 따라   ? ? ?  컬러가 존재한다.  눈으로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디지털 컬러를  가지게 되었지만, 마음은 어릴  72 크레파스를 선물 받았을 때처럼 설레지 않는다. 그만큼 '무슨 색을 써야 할지' 선택하는 고민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컬러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시선에 포착되는 장면 하나하나 컬러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감각을 세우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수한 컬러들이 있고 각각 어떤 성격이 느껴지는 듯하다. 책상의 베이지 색은 묵묵하고 데스크 매트의 그레이 색은 조용하다. 아이가 갖고 놀던 레고 블록의 원색들은 와글와글 모여 떠드는  같고, 남편 가방의 검은색은 어쩐지 지쳐 보인다. 10 달력에 동그랗게 표시한 형광펜 핑크색은 작은 면적이지만 눈에 띄고, 벽지의 밝은 그레이 색은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어도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컬러의 수는 얼마나 될까?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하지 않을까?  이상일 것이다. 컬러들이 사는 세상에 내가 잠시 들린  아닐까? 내가 컬러들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무슨 색으로 존재할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형태를 갖춘 일러스트가 아닌 컬러와 스토리만 있는 그림책 Leo Lionni (레오 리오니) "Little blue and little yellow (파랑이와 노랑이)" 떠올라서 행복해졌다. 그림책 안에는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파랑이네 가족, 노랑이네 가족, 다른 컬러 친구들이 존재한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단짝이다. 종이를 동그랗게 찢은  생동감 있는 컬러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둥글게 둥글게 놀이를 한다. 컬러들이 친구가 되고, 공원에 놀러 가고, 행복해서  껴안고, 갈등은 해결하며,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니,  그림책의 파랑색 파란이와 노란색 노랑이가 왠지 뭉클하게 마음에 닿는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색은 없다.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다만 어울리지 않는 배색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반대로 보고만 있어도 좋은 느낌을 주는 배색도 있다. 자신과 잘 맞는 누군가와의 관계처럼.  

10월 달력에서 뽑은 컬러 팔레트


 보던 것만 보고, 생각한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다르게 보고 싶어졌다. 나의  나만의 감성 카메라를 켜고,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며 컬러를 하나의 존재로 세심하게 느껴보려고 한다. 오늘 나는 세상의 어떤 색에 마음게 될까?  색은 내게 느낌을 주고, 어떤 영감을 줄까?  

책상 달력에 지난 날짜는 사선으로 긋거나 기억해야 하는 날은 강조해서 동그라미 친 형광 핑크색, 나의 중요한 스케줄로 남편이 연차를 써야 하는 날의 표시에 시선이 머문다. 무채색 배경에 핑크색이 포인트가 되어 더욱 강조된다. 작지만 확실하게 튀는 느낌. 달력 안에서 만큼은 존재감이 가득하다. '이 날을 잊지 말아 줘!'라고 외치는 것 같아서 어쩐지 귀엽기까지 하다. 나 역시 이 핑크색처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존재감 있는 행동을 상상해본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뭐가 좋을까?


누군가와의 관계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컬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어릴 때 72색 크레파스의 컬러를 보며 느꼈던 황홀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일상이 더 근사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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