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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Jul 20. 2024

반란군의 딸

teat 1979년 12.12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나중에 안 사살이지만 나는 이 무시무시한 일을 모두 저지른 반란군의 딸이었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별을 타고 난 일인지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나의 삶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내 삶에 어떠한 반란의 조짐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은 세상에 오늘 당장 전쟁이나 쿠데타가 발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아빠가 군인이었고, 설사 반란이 일어난다 해도 아빠가 이를 잘 진압하고 나를 잘 지켜줄 터였다. 그런데 거꾸로 아빠가 반란군의 일원, 아니 거의 주동자였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더 높은 계급을 향한 불가피한, 아니 반드시의 선택이었겠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였으므로 학창 시절 밤늦게 다니거나 연애를 할 엄두를 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빠가 어렵게 주선하여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당시 마지막으로 과외를 받은 세대가 되었는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부터는 과외가 전면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외금지 조치는 아빠를 비롯한 군부에 의한 교육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는데, 과외비가 워낙 비싸 계층 간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비판이 일던 중 내려져 비교적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추측건대 이 일은, 아빠가 과외 선생님을 구하는데 다른 일과 달리 무척 애를 먹은 데다가, 과외 금액도 군인에게는 워낙 고액이라 받기가 어려웠었고, 게다가 아빠의 군인 친구 아들과 내가 이미 과외를 받고 진학한 후여서, 이제 과외를 금지시켜도 될 것 같다는 모의가 있었다는 후문을 나중에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시를 얼마 남지 않은 그 해에는 결국 터질게 터지고 말았다. 10월의 어느 날, 어릴 적 가보고 싶어 했던 그 청와대에 산다는 대통령이 경호실장이 쏜 총을 맞고 서거했다는 뉴스가 신문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 거기서 일한다는 아빠가 조금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나는 세상일에 휘둘리지 않고 내 조용한 평화를 위하여 대학 입학시험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러더니 12월 어느 날은 엄마의 고종 사촌집으로 급격히 떠나야 할 일이 생길 정도로 내 삶에 처음으로 작은 물결이 출렁였다. 엄마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 이 조용한 평화가 영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 일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간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더욱 쾌활해 보였다. 그래서 그때는 전혀 반란군의 딸 같은 것으로는 불리게 될 일은 없어 보였다.


12월에 벌어졌던 난리 속에 많은 군인이 죽었다고 했지만 결국 아빠는 살아남았고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군인은 살아남았을 때, 학생은 합격하였을 때만 그 삶은 더욱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빠와 나는 높은 곳, 높은 계급을 위한 각자의 일을 성실히 내고 있었다.


서울대 섬유공학과였다. 과외 덕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뭐 딱히 할 것도 없었고 군인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공부가 당연히 받아야 할 훈련처럼 느껴졌다. 그래야 더 높은 계급장도 가능한 것일 테고. 그리고 섬유공학은 그 당시 국가에서 장려하는 사업이었기에 아빠가 권하기도 했고 아빠를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을 것 같아서 얼떨결에 선택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서 뭘 하고 싶은 꿈같은 건 막상 없었고 대학에 가서도 행동거지를, 아니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대학에 가서도 아빠가 지켜주는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벋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깰 필요도 없어 보였다.


아빠는 물론 그 당시 무척 기뻐했지만, 군인의 집안에서 서울대를 보냈다는 자부심에서 그런 것인지, 그 당시 아빠 자신이 더 높은 계급의 자리에 오르고, 국가를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자부심이 더 큰 것인지는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워낙 세상이 시끄러웠기에 아빠의 보호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은 어쩌면 두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지난 12월 처음으로 내 삶이 잠시 출렁일 뻔한 사건으로 인해 처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에는 당장 아니었고, 나중에도 한동안 괜찮았지만, 결국 머나먼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결국 '반란군의 딸'이란 오명을 뒤집씌워 주었다. 그때 그 불안한 예감대로 어긋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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