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안 사살이지만 나는 이 무시무시한 일을 모두 저지른 반란군의 딸이었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별을 타고 난 일인지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나의 삶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내 삶에 어떠한 반란의 조짐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은 세상에 오늘 당장 전쟁이나 쿠데타가 발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아빠가 군인이었고, 설사 반란이 일어난다 해도 아빠가 이를 잘 진압하고 나를 잘 지켜줄 터였다. 그런데 거꾸로 아빠가 반란군의 일원, 아니 거의 주동자였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더높은 계급을 향한 불가피한, 아니 반드시의 선택이었겠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였으므로 학창 시절 밤늦게 다니거나 연애를 할 엄두를 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빠가 어렵게 주선하여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당시 마지막으로 과외를 받은 세대가 되었는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부터는 과외가 전면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외금지 조치는 아빠를 비롯한 군부에 의한 교육개혁조치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는데, 과외비가 워낙 비싸 계층 간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비판이 일던 중 내려져 비교적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추측건대 이 일은, 아빠가 과외 선생님을 구하는데 다른 일과 달리 무척 애를 먹은 데다가, 과외 금액도 군인에게는 워낙 고액이라 받기가 어려웠었고, 게다가아빠의 군인 친구 아들과 내가 이미 과외를 받고진학한후여서, 이제 과외를 금지시켜도 될 것 같다는 모의가 있었다는 후문을 나중에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시를 얼마 남지 않은 그 해에는 결국 터질게 터지고 말았다. 10월의 어느 날, 어릴 적 가보고 싶어 했던 그 청와대에 산다는 대통령이 경호실장이 쏜 총을 맞고 서거했다는 뉴스가 신문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 거기서 일한다는 아빠가 조금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나는 세상일에 휘둘리지 않고 내 조용한 평화를 위하여 대학 입학시험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러더니 12월 어느 날은 엄마의 고종 사촌집으로 급격히 떠나야 할 일이 생길 정도로 내 삶에 처음으로 작은 물결이 출렁였다. 엄마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 이 조용한 평화가 영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파고들었다.하지만 아빠는 아무 일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간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더욱 쾌활해 보였다. 그래서 그때는 전혀 반란군의 딸 같은 것으로는 불리게 될 일은 없어 보였다.
12월에 벌어졌던 난리 속에 많은 군인이 죽었다고 했지만 결국 아빠는 살아남았고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군인은 살아남았을 때, 학생은 합격하였을 때만 그 삶은 더욱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빠와 나는 더 높은 곳, 더 높은 계급을 위한 각자의 일을 성실히 해 내고 있었다.
서울대 섬유공학과였다. 과외 덕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뭐 딱히 할 것도 없었고 군인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공부가 당연히 받아야 할 훈련처럼 느껴졌다. 그래야 더 높은 계급장도 가능한 것일 테고. 그리고 섬유공학은 그 당시 국가에서 장려하는 사업이었기에 아빠가 권하기도 했고 아빠를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을 것 같아서 얼떨결에 선택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서 뭘 하고 싶은 꿈같은 건 막상 없었고 대학에 가서도 행동거지를, 아니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대학에 가서도 아빠가 지켜주는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벋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깰 필요도 없어 보였다.
아빠는 물론 그 당시 무척 기뻐했지만, 군인의 집안에서 서울대를 보냈다는 자부심에서 그런 것인지, 그 당시 아빠 자신이 더 높은 계급의 자리에 오르고, 국가를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자부심이 더 큰 것인지는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워낙 세상이 시끄러웠기에 아빠의 보호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은 어쩌면 두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지난 12월 처음으로 내 삶이 잠시 출렁일 뻔한 사건으로 인해 처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에는 당장 아니었고, 나중에도 한동안 괜찮았지만, 결국 머나먼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결국 '반란군의 딸'이란 오명을 뒤집어씌워 주었다. 그때 그 불안한 예감대로어긋남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