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가 눈을 뜨자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수는 다락방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내려왔다.
“일어났니?”
윤수는 대답 없이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완전히 변한 아침 분위기이었다. 어느덧 쌀쌀해지기 시작한 가을처럼, 차갑고 건조하며 메말랐다.
윤수가 씻고 나오자 도시락을 다 싸 둔 성문이었다. 윤수는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신고, 가방을 매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은 뒤 뒤돌아 선채 입을 뗐다.
“다녀올게요.”
“그래, 갔다 와.”
쾅. 문이 닫히자, 성문은 한동안 윤수가 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신뢰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성문은 주방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씻고 용모를 단정히 한 뒤 처음으로 채연서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
윤수는 멍한 상태로 걸었다. 린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개울가를 다 건너고 나서야, 뒤에 있는 린의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윤수는 고개를 돌린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그녀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반점들이 얼굴에 돋아나 있었다. 이번에는 더 심각한 상태로, 검붉은 채였다.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린은 빠른 걸음으로 윤수를 지나쳤다. 윤수는 꼭 주말에 있었던 박중구와의 사건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윤수가 황급히 그녀 곁으로 가자, 린이 힐끔 그를 쳐다봤다.
“입술이 터졌네?”
“아... 응...”
“누구한테 맞은 거야?”
윤수는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현재는 린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말야... 그제 박중구 아저씨가 나하고 우리 아빠를 죽이려 했어.”
린의 걸음속도가 늦춰졌다.
“박중구 아저씨가 왜?”
“우리 아빠가... 학교 다닐 때 그 아저씨를 많이 괴롭혔나 봐. 그래서 복수를 하려고...”
“그럼 너희 아빠 때문이라는 거네?”
린이 말을 가로챘다. 윤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중구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
“우리 아빠가 신고해서, 경찰한테 붙잡혔어. 그대로 감옥에 들어갈 거 같아.”
“아쉽네.”
“응?”
윤수가 고개를 돌려 린을 쳐다봤다.
“아쉽다니?”
“오늘 내가 해결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워.”
해결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윤수는 짐작이 갔지만 감히 해석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면 린을 대하는 게 또다시 껄끄러워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너 마스크 안서도 괜찮은 거야? 원래는 썼었잖아.”
“응. 근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왜?”
“글쎄, 이유는 오늘 알게 될 수도.”
윤수는 린이 며칠 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차갑고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
교실에 들어가자 오늘은 의외로 다른 아이들이 빨리 등교한 채였다. 형석도, 기찬도, 쌍둥이 형제 성태와 상태도 교실에 있었다. 쌍둥이들은 교실에 들어오는 린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우웩-”
“행님아 저거 봐봐~!”
형석에게 몸을 돌리고 있던 기찬을 잡아당기는 쌍둥이들이었다.
“어? 언청이 얼굴 왜 저러노?”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린에게 집중됐다. 린이 자리에 앉자 기찬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 너 무슨 병 걸린 거 아이가? 병원에 가지 왜 학교에 와서 이러나.”
“더럽다 더러워~”
성태가 혀를 내두르며 거들었다. 린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상태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멍청이 누나야. 마스크라도 써라. 밥맛 떨어진다.”
그때까지 윤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린의 얼굴이 흉측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윤수야, 네가 봐도 그래?”
린이 윤수를 쳐다보고 물었다.
“어?”
“네가 봐도 내가 흉측해 보여? 그래서 가만히 있는 거야?”
윤수는 정곡을 찔려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네가 쟤네들처럼 나에 대한 나쁜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기찬이 앞으로 나오며 입을 뗐다.
“뭐라는 기가? 니 빨리 집에 가서 마스크나 쓰고 와라. 징그럽다 아이가.”
“그러면 못 보게 해 줘?”
린이 기찬을 쳐다봤다. 윤수는 학교에 전학을 한 후 린이 아이들의 말에 대답하는 걸 처음 봤다. 그리고 그게 무엇으로 다가올지 쉽게 예견했다.
“린!”
윤수가 외쳤다. 린이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색 동공이 사라지고 있었다. 덩그러니 흰자위가 나타났다.
“린! 하지 마!”
윤수는 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행님, 재 왜 저러노?”
기찬이 겁을 먹었다. 형석은 이상하다며 린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때였다.
퍼어엉!
천장에 있던 형광등이 터지더니 유리조각이 기찬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악...!”
기찬이 소리쳤다. 형광등 파편이 그의 머리에 빽빽이 꽂혔다.
“기찬이 행님!”
“행님 괜찮아?”
쌍둥이들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아... 행님아 어떡하노....”
기찬은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로 형석에게 도움을 청했다.
“가만히 있어라. 선생님 모셔 올께.”
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달려갔다.
윤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린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찬은 새파란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어때? 이제 내 얼굴 안 보여?”
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니 죽는다! 헛소리하지 말래이!”
기찬이 받아쳤다.
잠시 후, 형석이 민환을 데리고 왔다. 민환은 기찬을 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바로 기찬을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
성문은 밥맛이 없지만, 꾸역꾸역 아침을 먹었다. 반찬통에 오늘 아침에 한 요리 김치볶음과 소시지. 계란말이를 담은 뒤 보자기에 쌌다. 매듭을 지은 뒤 보자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에서야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서든 채연서에게 성의를 표하고 싶었다.
저벅저벅 채연서의 집으로 향했다, 만약 그녀가 지난 저녁처럼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도 놀라면 도시락만 놓고 올 심산이었다.
성문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속도를 냈다. 그것이 지금 그의 어중간한 마음이기도 했다. 성문은 뚜벅뚜벅 걸으며 곧 빨간색 지붕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한번 심호흡을 한 뒤 곧바로 텅 비어 있는 마당에 들어섰다.
“연서야...”
성문은 자신감 없는 투로 음성을 냈다. 목소리를 듣고 놀라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채연서를 부를 수도 없었다.
“연서야, 나 성문인데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성문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자신의 목소리와 이름을 듣고 놀랄게 뻔해, 사과를 통해 안심을 시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닫이 문 안쪽은 조용하기만 했다.
“연서야... 내가 도시락 싸웠는데 나눠주고 싶어서. 이것 좀 주고 가도 될까?”
성문은 처음부터 연서의 마음을 얻기를 바라지 않았다. 일단은 먼발치에서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사과를 한 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반찬을 주고 돌아갈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용하기만 했다.
성문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형사였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저 가해자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온 거라 여겼다.
“미안한데, 문 좀 열어도 되지? 도시락만 놓고 갈게.”
성문은 말을 마친 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미닫이 문을 열었다.
“저기, 이거...”
성문의 말문이 멈췄다. 집 안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성문은 육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형사로서의 감각이 깨어난 순간이었다.
“하아...”
성문은 짧게 탄식했다. 사람이 죽은 냄새가 분명했다. 형사 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맡아봤고 적응할 수 없는 냄새였다. 성문은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살피자 왼쪽 구석에 이불이 원뿔 형태로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성문은 복잡한 심경으로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쪽으로 걸어가 손으로 이불을 잡아 빠르게 걷어냈다. 그 안에는 연서가 벽에 다소곳이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