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수.”
성문이 말했다. 윤수는 아버지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손에 들려 있는 것. 린이었다. 아버지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린을 소중한 딸처럼 안고 있었다.
“말해라.”
“네?”
“왜 린을 여기다가 숨긴 건지 말해.”
“숨기다니요? 무슨 말이에요, 아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성문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너 지금 누구야?”
“무슨 말이세요?”
“지금 나와 대화한 사람이 누군지 묻는 거다.”
“저잖아요.”
“기찬이한테 들었다. 네가 죽이려 했다면서?”
“제가요?”
“또 기억 안 난다고 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냐?”
“참네.”
윤수가 히죽이며 말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뭐가 더 궁금한 거예요?”
“뭐?”
“기찬이가 말했다면서요. 근데 뭐가 더 궁금하냐고요!!”
성문은 움찔거렸다. 눈앞에 있는 아이가 내 자식이 맞나 싶었다.
“린, 이리 주세요.”
“그럴 수 없다.”
“다 죽여놓고...”
윤수가 낮게 읊조렸다.
“다 죽여놓고...”
“...뭐?”
“다 죽여놓고 왜 기찬이만 살려두려는 거야!!”
윤수가 소리쳤다.
그 순간 복도에 강풍이 불더니 하늘에서 번개가 터져나갔다.
퍼어어엉!
동시에 창문이 박살 나며 유리조각이 성문의 얼굴을 베었다. 윤수가 성문을 밀치고 복도를 달려 나갔다.
“지윤수 거기 안 서?!”
성문은 고함을 치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어깨에서 꿈틀 거리는 느낌이 나더니 린이 움직였다. 그녀는 성문 어깨에서 내려와 바닥에 착지한 뒤 윤수를 따라 걸었다.
성문은 넋이 나갔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깨에 여전히 린이 있었다. 성문은 윤수를 쫓아갔다.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가 1층에 당도했다. 윤수가 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성문도 뒤따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벌컥! 현관문이 닫혔다. 힘으로 밀고 당겨도 꼼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소녀.
린이었다. 린은 성문을 힐끗 쳐다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문은 이게 무슨 현상인가 싶었다. 꼭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린은 내가 들춰 매고 있지 않은가? 성문은 결국 포기하고 문밖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어둠처럼 이것은 내 능력 밖이라는 걸 깨달았다.
***
기찬은 헐레벌떡 학교 복도를 가로 지었다. 윤수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게 충격이었지만, 방금 보인 괴이한 모습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 마냥 허공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던 윤수. 그는 모종삽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다 못해 심지어 머리통을 찍었다. 그 광경에 기찬은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던 중, 무언가에 강하게 부딪혔다. 기찬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기찬아 괜찮니?”
고개를 들자 성문이었다. 기찬은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아저씨...”
“그래, 무슨 일이야? 왜 맨발로 여기까지 온 거야. 응?”
“린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어예...”
“린이..?”
성문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래서 린은 어디에 있는데?”
“3층 남자 화장실에 있어예... 그런데... 그런데...”
기찬이 울먹이며 이어 말했다.
“윤수가 거기서 저를 죽이려 했십니다...”
성문은 인상을 찌푸렸다. 집에 있는 윤수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뜻이었다.
“윤수가? 잘못 본거 아냐?”
“아입니다. 모종삽을 들고 저를 죽이려고 했십니다...”
“모종삽...?”
성문은 윤수가 구형석을 죽일 때 썼던 도구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의심을 거뒀다.
“알았어. 아저씨가 올라가서 확인해 볼 게.”
“그냥 같이 빠져나가예...”
기찬이 성문의 바지춤을 잡았다.
“학교에 실종된 린이 있다며? 데리고 와야지.”
“그럼 빨리 갔다오셔예...”
“그래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성문은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기찬은 1층 현관문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너무나도 추웠다. 오한이 온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고 손이 떨렸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기찬은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불안에 떨었다.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성문은 소식이 없었다. 게다가 숨 막힐 듯한 이 정적. 미치도록 고요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톡. 톡.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찬은 그 소리가 마치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들렸다. 몸을 일으켜 현관문 바깥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휘이이잉! 강풍이 휘몰아치더니 3층에서 창문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퍼어어엉-
기찬은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학교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바깥으로 나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던 중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뛰다가 돌멩이를 밟아 고통에 침음을 흘렸다.
탁...탁...
다리를 절뚝이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탁. 탁.
이상했다. 발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탁.탁.탁.
고개를 돌리자 윤수가 보였다.
“기찬아 멈춰봐!”
기찬은 소스라쳤다. 윤수를 보자마자 전력을 다해 뛰었다.
“기찬아, 멈춰보라니까!”
듣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이기찬! 사과하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라!”
기찬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니, 또 내 속이고 죽이려는 거지! 다 안다 아이가!”
윤수가 달리기를 멈추자, 기찬도 숨을 헐떡이며 쉬었다. 윤수의 머리에 응고된 피가 비를 맞고 뺨으로 흘렀다.
“기찬아, 미안해. 내 안에 다른 애가 있나 봐. 지금은 너를 죽일 생각 없어. 사과하려고 그런 거야.”
“그러면 따라오지 마라! 린 죽인 것도 모자라서 우리까지 다 죽이려고 그러나!”
“...뭐?”
“내 모를 줄 아나. 다 안다, 아이가! 니가 린 죽이고 화장실에 숨긴 거!”
“그건...”
윤수가 입을 떼지 못하자, 기찬이 이어 말했다.
“니 지금까지 우리한테 덤텡이 씌운 거지? 니가 린 죽여 놓고 우리 때문에 린이 죽은 것처럼 덤텡이 씌운 거지?!”
꿈틀.
윤수는 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건... 내가 일부로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윤수는 말을 맺지 못했다. 모두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로 내가 린을 죽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았다.
“린을 죽인 건 니다! 우리가 아니라 니가 죽인 거야!”
꿈틀.
다시 한번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시발.”
윤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젠... 하다 하다 못해 나를 살인자 취급하네.”
윤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성큼성큼 발을 떼 걷기 시작했다. 기찬은 화들짝 놀라 다시 도망쳤다. 학교 정문을 통과해 언덕 위로 올라갔다. 윤수가 올라오지 못할 거라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깽깽이걸음을 했다. 발에 물집이 잡혀 걸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사이 윤수가 거리를 좁혔다.
기찬은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이 고통만 참으면 벗어날 수 있다. 윤수에게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언덕에 올라서자마자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지며 돌부리에 걸렸다.
“악!”
기찬은 앞으로 철퍼덕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턱이 깨져 잇몸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아흑....”
기찬은 손으로 턱을 감싸며 일어났다.
“...이제 다 도망친 거야?”
윤수가 등 뒤에서 말했다. 그리고 양손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돌.
“아...아이아..."
“뭐라고?”
윤수가 물었다.
기찬은 울먹이며 혀를 굴렸다. 하지만 넘어질 때 혀도 씹혔는지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아이...."
“자꾸 뭐라는 거야? 개새끼도 아니고.”
윤수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기찬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마치 작두에 목을 내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잘 들어.”
윤수가 말했다.
“린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너희야. 내가 너희를 살렸기 때문에, 내가 다시 죽이는 거야. 알았어?”
파직-!
윤수는 기찬의 머리에 돌덩이를 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멈추지 않았다. 기찬은 물가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다리를 발버둥 치다, 이내 반듯하게 멈췄다.
“푸...”
윤수가 팔뚝을 올려 입을 가리더니,
“푸하하하!”
즐겁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마지막 희생자를 끝냈다. 떨어지는 빗물에 기찬의 혈흔이 씻겨나갈 때였다.
“이제 시원해?”
윤수는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린?”
“다 죽이니까 속이 시원하냐구.”
“아, 아니. 나는 그냥 너를 도와주려고...”
윤수는 금방 감정이 다운된 채로 말했다.
“나는 너한테 애들을 죽여달라고 한 적 없어.”
윤수는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무슨 말이야. 린... 기억 안 나? 네가 분명 느티나무에서 애들을 죽이라고...”
“그런 적 없어. 나는 너랑 대화한 적 없어.”
윤수는 린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를 인형처럼 부려먹더니만 애들을 다 죽이고 나니까 시치미를 뗀다.
“내가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건데... 뭘 위해서... 지금까지...”
“널 위해서겠지.”
린이 말했다. 윤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자 린이 이어 말했다.
“모든 건 널 위해서였어. 날 위해서가 아냐.”
“시발... 지금 장난해?”
윤수가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웠는데, 이게 모두 날 위해서라고?”
윤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양팔로 린의 목을 졸랐다.
“그럼 너도 죽어...! 진짜로 죽어서... 없어져...!”
힘을 준 윤수의 팔이 떨렸다. 그럼에도 린은 표정의 변화 없이 윤수를 쳐다봤다.
“정말...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셈이야?”
“뭘 인정하라는 건데... 뭘...!
“윤수야.”
린의 손이 올라갔다. 윤수는 그녀의 행동에 움찔거렸다.
이내 살포시 윤수의 뺨을 어르어 만졌다.
“윤수야. 나는 네가 편해졌으면 좋겠어.”
“...뭐?”
“나에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구.”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게. 네가 말했지? 니가 죽게 되면 유언장애 쓴 글을 읽어보라고 한 거.”
린이 가만히 윤수를 바라봤다.
“나 그거 사실 읽었어. 거기에 쓴 말. 진심으로 한 이야기야?
굿을 했던 날. 윤수는 성문과 함께 린의 집으로 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윤수는 성문 몰래 린의 책가방에서 유언장을 가져갔다. 다락방에서 읽어본 유언장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윤수야 미안해. 너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해서. 하지만 나는 살인을 멈출 수 없을 테고, 나를 멈출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거든. 그래서 참 좋아. 내가 정신이 나가기 전에 나를 죽여줘서. 그러니까 윤수야. 너도 고통받지 마. 사람들을 용서해 줘. 나는 그게 안 돼서 죽게 되었지만, 너는 그러지 않을 수 있잖아. 너희 아빠가 시간이 지난 후 잘못을 뉘우쳤던 것처럼,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책하면서 스스로 뉘우치는 날이 올 거야. 그때 가장 괴로운 사람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걔네들이야. 그러니까 용서해 줘 윤수야.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해.』
윤수는 유언장을 구겼다. 절망스러웠다. 린은 마치 내가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린이 이야기한 데로, 그녀가 믿는 데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봐! 넌 내가 정말로 걔네들을 용서했으면 했던 거야?”
윤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를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아니.”
“그럼? 네 말대로 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써놓은 거야?”
“…….”
“말해봐! 난 어떻게 했어야 옳은 거야? 절대로 애들을 용서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거냐고!”
이윽고 린이 입을 뗐다.
“죽었어야 했어.”
“뭐...?”
“아이들을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면 너도 나처럼 죽었어야 했어.”
윤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고 항변했다.
“내가 죽으면 너에 대한 복수는 누가 하는데?!”
“그런 건 없어 윤수야. 그런 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거야.”
“개떡 같은 소리 하지 마! 나야말로 그런 건 없어. 잘못을 저질렀으면 누구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해.”
“그러면 너는? 사람을 죽인 너는? 어떤 대가를 치를 거야?”
“…….”
윤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죽으면 돼. 이제 복수를 끝냈으니까.”
린이 조용히 윤수를 바라보았다. 이내 자신의 목을 조르던 윤수의 팔을 잡더니 언덕 꼭대기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너를 죽여줄게. 그럼 나한테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윤수는 목을 조르던 양팔을 축 늘어트렸다. 실의에 빠진 것처럼, 낭떠러지 밑을 보며 입을 뗐다.
“린... 만약에 말이야...”
윤수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네가 죽지 않고 살았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좋은 친구가 됐을 거야.”
“정말 그럴까? 혹시 우리 사이가 더 나빠진다거나 괴롭진 않을까?”
“너와 내가 포기를 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해.”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윤수는 바람을 만끽하듯 양팔을 벌렸다. 정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중,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네! 이제 보니까 여기가 너를 처음 봤던 곳이야. 내가 이사 올 때, 네가 이 자리에 서 있었어!”
윤수는 두 눈을 감았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언덕 위에 초연히 서 있던 린과 눈을 마주친 날을 떠올렸다.
“윤수야. 그때 날 구해준 사람이 너야. 그때 네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시도하지 못했어.”
“너무 바보 같았으니까.”
윤수가 씩 웃으며 린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자!”
“그래 그렇게 하자.”
윤수는 미소 지으며 낭떠러지에서 몸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린에게 말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더 노력해 볼게.”
윤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아래로 떨어졌다. 린도 윤수의 손을 잡고 함께 낙하했다. 윤수의 머릿속에서 시간의 파노라마가 쳤다. 린과 다시 마을에서 재회한 날. 그녀와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성장하며 아름다움이 가득한 날. 더는 린의 고통과 자신의 괴로움이 없는 날. 걱정과 근심이 모두 사라지고 웃고 있는 린의 모습만이 가득한 날.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그것이 찬란하게 물들며 붉어질 때,
세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