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다.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거야?”
윤수가 미소를 띠었다. 기찬은 윤수 손에 들려있는 모종삽을 발견했다. 빨간 혈흔이 묻어 있었다.
“뭐 해? 린처럼 굳어가지고서는.”
“그, 그게...”
기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윤수가 박수를 한번 짝! 치며 말했다.
“좋아! 어차피 온 김에, 린에게 사과하자.”
“사과...?”
“잊었어? 어제 했던 말?”
윤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기찬은 억지로 웃으며 입을 뗐다.
“아, 아니.. 알고 있다... 지금 사과하까..?”
“그래, 무릎 꿇고 해.”
기찬은 다리를 떨며 무릎을 꿇었다. 화변기에 꽂혀 있는 린을 쳐다봤다.
뚝. 뚝.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고개를 젖힌 린의 이마를 맞추고 있었다. 기찬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미안하다, 린아... 잘못했다... 니를 이렇게 만든 건 다 내 책임이다... 평생 사죄할게...”
기찬은 말을 마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 윤수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모종삽으로 목을 내려 칠 것만 같았다. 그 침묵의 시간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일어나.”
윤수가 말했다.
기찬이 고개를 돌리자, 윤수는 일어서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린이 사과받아준대.”
기찬은 서늘한 간담을 안고 숨을 뱉었다.
“그런데, 말야”
윤수가 이어 말했다.
“내가 널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야.”
윤수가 모종삽을 휘둘렀다. 기찬은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뒤 윤수의 다리를 붙잡았다.
“미, 미안하다!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나!! 잘못했다!!”
“용서?”
“그, 그래. 어제 니도 내 사과받아주지 않았나!”
“받아줬지.”
“근데, 와 그러노...!”
기찬이 울먹이자 윤수가 피식거렸다.
“린을 죽게 만든 건 용서 못하니까. 그러니까 기찬아. 잠깐만 그대로 있어.”
윤수는 모종삽 끝으로 기찬의 등을 내려 찍었다.
“아아악!”
기찬은 신음을 토하며 도망쳤다.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내달렸다. 암막을 친 듯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형석이도 그렇게 도망치다 죽은 거 몰라?”
어둠 속에서 윤수가 말했다. 기찬은 히죽이며 걷고 있는 윤수를 돌아봤다. 마치 재미있는 사냥감을 구경하는 듯했다.
기찬은 무작정 앞으로 질주했다. 윤수에게 빠져나가려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막다른 곳이었다. 계단이 있는 통로가 아니라 복도 맨 끝이었다. 기찬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윤수가 왜 여유롭게 걸어오던 건지 깨달았다.
“큰 일이다. 도망갈 데가 없네?”
윤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찬은 하는 수 없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포르말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과학실이었다. 올빼미, 박쥐, 고양이와 같은 수많은 동물들이 박제가 된 채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기찬은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여차하면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저히 뛸 수 없는 높이였다. 최소 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박살 날 것만 같았다.
쾅. 쾅.
윤수가 옆 교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찬아 어디 있어?”
교실 창문으로 윤수가 과학실로 걸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기찬은 숨을 곳을 찾아봤지만, 이 낡아빠진 교설에 그런데는 보이지 않았다. 윤수에게 잡히면 저 올빼미 박제 옆에 내 머리가 놓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찬은 교실 앞문으로 뛰어가 문을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드르륵- 쾅!
윤수가 과학실 뒷문을 열고 나타났다.
“멍청한 새끼. 겨우 숨은 곳이 여기야?”
기찬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윤수가 한발 한발 걸어오는데도 이상하게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점점 숨이 막혀왔고 구역질까지 나왔다.
기찬은 결국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을 흘리며 쭈그려 앉아 있자, 윤수가 기찬의 머리채를 잡았다.
“죽어.”
그 말과 함께 모종삽을 휘둘렀다.
퍽.
하지만 모종삽에 맞은 건 기찬이 아니라 윤수였다.
“죽어.”
퍽.
“죽어.”
퍽.
기찬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윤수를 올려다봤다. 윤수가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 가슴에 모종삽을 박고 있었다. 기찬은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복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윤수가 입을 실룩 거렸다.
“또 방해하는 거야?”
“응.”
다혜가 대답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거 같아?”
“안 그러면?”
“방법이 있지.”
윤수가 씩 한쪽 입 꼬리를 올리더니 그대로 자기 머리에 모종삽을 박았다.
***
“10초간 시간을 줄게, 돌아가던가, 지켜보던가, 둘 중 하나만 해.”
린이 용언 폭포 동굴 안에서 말했다.
“벌써 5초 지났어. 결정 안 할 거야?”
“린... 제발!”
“사... 삼... 이... 일...”
“린!”
마을 이장이 몸을 기울일 때였다.
툭.
윤수는 자기도 모르게 린을 폭포 밑으로 밀었다.
***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어.'
'린 너는 다 알고 있지?'
윤수는 꿈속에서 떨어지고 있는 린을 보며 말했다. 린이 기울어지며 윤수를 쳐다봤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린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였다. 옅은 미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꼭 잘했다고 칭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잘했다고? 내가 왜?'
윤수는 화가 났다. 린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지금 떨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데? 뭐가 기쁘다고 웃는 거야. 지금 이게 좋다는 거야?'
린이이이이인!!!!!
윤수는 악다구니를 쳤다. 아래로 떨어진 린이 보이지 않았다. 윤수는 폭호 아래로 뛰어갔다. 숨이 넘어갈 듯 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지만 린이 보이지 않았다.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주변 계곡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이내, 해파리처럼 둥둥 뜬 채로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린이었다.
“린!!”
린은 유속에 떠내려가며 계곡 바위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윤수는 그 광경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 린을 붙잡기 위해 계곡을 따라 달려 내려갔다. 린은 바위에 또 한 번 부딪힌 뒤, 식물 줄기에 걸렸다.
“제발... 제발...”
윤수는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물의 깊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발 떠내려가지 말라는 마음뿐이었다. 물살을 헤치며 다가가자 발이 움푹 빠졌다. 가슴까지 왔던 물이 순식간에 머리를 뒤덮었다.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하지만 윤수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린의 어깨를 잡았다. 물을 먹으면서도 린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윤수는 계곡 바깥으로 나와 마신 물을 토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린이 사라질까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린...”
윤수는 창백하게 젖어있는 그녀를 보며 흐느꼈다. 원래 피부가 새하야니 아직 죽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린은 반응이 없었다. 심폐소생술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린은 영혼을 강탈당한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제발...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윤수는 엉엉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린과 자신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에는 단 두 명의 아이만 존재하고, 그중 한 아이가 죽었으니 이를 지키지 못한 어른들은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용서하면 안 돼.}
누군가가 말했다. 동시에 수많은 목소리들이 윤수에게 말했다. 모두 가만히 있지 말 것을 권고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파괴시킨 이들에게 복수할 것을 종용했다.
복수.
복수.
복수...
그 단어가 뇌리에 각인되자 윤수는 괴로움에 소리쳤다. 생명이 살아있고 숨 쉬는 것에 토악질이 나왔다.
***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윤수가 번뜩 눈을 떴다.
절뚝이며 과학실을 나오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뇌리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쳤다.
“린...?”
윤수는 3층 화장실에 린이 있던 걸 떠올렸다. 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을 할 수 있다.
윤수는 숨을 헐떡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복도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나아갔다. 절뚝거리며 화장실 문을 집다가 휘청이며 앞으로 넘어졌다. 윤수는 화변기 문을 쳐다봤다. 4개의 문이 모두 열린 채로,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네 번째 칸을 향해 기어갔다.
뚝. 뚝. 뚝.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린이 있어야 할 곳에 물방울 만이 애처롭게 떨어지고 있었다.
윤수는 그럴 리가 없다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누군가가 린을 가져갔다. 나만이 보살펴 줄 수 있는 그녀를 데려갔다.
윤수는 린을 찾아야 한다며 복도로 나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마치 포식자에게 꼼짝없이 걸려든 느낌이었다. 윤수가 고개를 돌리자, 성문이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