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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01. 2019

카미노는 중독이자, 해독이다-세 번의 산티아고 순례길

인생을 닮은 카미노 이야기


카미노(Camino:걷기)는 중독이자, 해독이다.


이른 아침에 마주하는 모든 풍경이 새롭다. 어슴푸레 내려앉아 졸고 있던 밤안개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달아날 채비를 한다. 부지런한 새들은 방금 먹은 아침을 소화시키려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고, 아직은 쌀쌀한 이른 봄의 바람에 손끝이 살짝 시리다. 등 뒤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새 날의 시작을 알린다.


어제의 나는 회색빛 얼굴을 하고 잿빛 공기를 마시며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익숙한 길, 내 오랜 일터로 향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자연에 연신 한눈을 팔며 걷는다. 포도밭 사이로 난 길, 그리고 그 길과 맞닿은 파란 하늘, 또 그 안을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 자연이 뿜어내는 깨끗한 공기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잠들어버린 줄 알았던 감각신경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내 안에 억눌려있던 자유 영혼이 꿈틀거린다.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은 이 길이 주는 신선한 자극에 시나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초반의 며칠은 내 안의 나와 가끔씩 티격태격했었다.

이렇게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지, 이러다 나만 힘든 노후를 맞는 건 아닌지, 배낭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본격적으로 중독에 빠지기 전에 흔히 발생하는 이러한 저항은 일주일쯤 지나면서부터 아침을 맞은 밤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 깊은 탐닉의 시간과 함께 해독의 시간이 찾아온다.

어깨를 짓누르며 나를 괴롭혔던 배낭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내 몸에 딱 들러붙는다. 가끔 예민하게 굴던 내 자아도 이 여유로운 삶의 매력에 빠져든다.

뇌 속에 잔뜩 끼어있던 잡념의 찌꺼기들이 한 겹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일상의 불만족을 위로해주었던 야식의 부작용으로 늘어난 위장 벽의 기름때도 점점 벗겨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힘이 강해진 심장은 신나게 펌프질을 한다. 일상에선 만성피로를 선사하며 제구실 못해 손가락질받았던 간은 이제야 쌓여 있던 독소를 배출해내며 '간 때문이야~'라는 오명을 벗는다. 내 생애 이보다 더 깨끗한 피가 온몸 구석구석에 흘렀던 적이 있었던가?! 육체와 정신이 연신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이 모든 긍정적 변화는 카미노가 선사하는 건강한 중독이 이끈  깔끔한 해독의 결과다.




길을 걸으며, 수천 년 전 이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죽지 않고 살아서 도착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이 길을 걸었을 순례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때의 그들이 각자가 지은 죄를 씻어내기 위해 완수해야만 했던 그 미션의 성공 여부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을 사항들은  거리(distance), 시간, 날씨가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에게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이러한 장애물들은 시대를 넘어 우리 앞에도 똑같이 놓여있었다.

이것들을 뛰어넘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하는 법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끈기와 부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유연함을 배워야 했다.

보통의 휴가나 여행에서는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가혹한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그 힘듦조차도 미덕(virtue)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천연덕스러움도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미노는 우리에게 더 깊은 마음공부를 위해 도전해볼 것을 말한다. 

춥고, 배고프고, 지치는 상황을 참고 이겨낸 후 만난 딱 내 키만 한 낡은 침대 한 칸이,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감사하고 행복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어깨가 끊어질 듯 아픈 상황에서도 스치듯 걷는 다른 순례자들에게 진심 어린 인사(Buen Camino) 주고받으며, 동지애에 힘을 얻어 미소 지을 수 있음을 배운다.


길을 걷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게 되었다.  카미노는 부부가 두 손 꼭 잡고 오순도순 산책하듯 걷는 남산 둘레길과는 차원이 다른, 고행의 고(苦)를 등에 업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Go) 한다는 것을.

길을 걸으면서 맞닥뜨린 가끔은 벅차게 감동스럽고 또 때로는 내려놓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들이 우리가 살아내는 인생의 하루하루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한 치 앞도 알기 힘든 게 인생이듯, 카미노도 끝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계획한 대로 걸어질지, 내가 원하는 날에 그곳에 도착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세 번 마주한 카미노 길에서의 잊지 못할 경험들을 통해 나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고 타인과 더 넓게는 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의 이야기를  미덕(virtue)의 가치와 결합해 풀어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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