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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03. 2019

카미노, 월든 그리고 나- 단순함, 자립심

산티아고 순례길 두 번째 이야기


원시시대의 인간은 발가벗은 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체류자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음식과 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면, 인간은 또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천막 속에 머물고, 계곡을 누비거나  평원을 가로지르고 산을 올라탔다. 하지만 보라!

이제 인간은 사용하던 도구의 도구가 되었다. 배가 고프면 마음껏 과일을 따먹던 인간은 이제 농부가 되었고, 은신처를 찾아 나무 밑으로 들어가던 인간은 집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제 더는 밤에 야영을 하지도 않는다. 땅 위에 정착하고 하늘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월든 Walden, or Life in the Woods> 중에서.


누군가가 내게 사회인이 되고 난 이후의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과 책을 물어 온다면,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책 <월든>이라고 조심스럽게 답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2년 2개월 하고 2일의 시간을 물질에 대한 욕심과 인습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월든 숲 속에서

살면서 홀로 철저하고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자연과 인생을 직시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월든>이다.

이 책과 산티아고 순례길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


단순함의 미학과 자아성찰

<월든>을 통해 소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의식주 그리고 연료.

그는 책에서 이것들을 얻는 과정을 몸소 보여주며, 얼마나 얻기 쉬운지를 증명해 보였다.

그러고 나서 강조했다. 이 필수 아이템들을 얻고 난 후의 시간은 더 많은 것을 굳이 얻으려 애쓰지 말고 자아성찰에 몰입할 것을.

사실, 카미노에서는 약간의 돈이면 먹을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는 기본으로 해결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옷은 욕심내서 많이 가져가 보았자  배낭의 무게만 늘릴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버리고 싶은 마음만 가중시킨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여벌의 옷이면 충분하다.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의 카미노는 오롯이 내 안의 나에게 집중할 것을 주문한다.


내 안으로부터 번잡하게 마구잡이로 얽혀있는 생각의 뭉치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시작으로, 이 타래들을 조심조심 끊어지지 않게 풀어냈다.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 버리고 중요한 부분만 남기면  것 같은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제 아침에도 했던 고민을 오늘 또 하고 있었다.

답이 없는 물음에 또 다른 질문이 들러붙기도 했다.

무릎은 힘들다 삐그덕 대고 어깨는 제발 배낭 안에 가득 찬 욕심을 좀 버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날수록 몸도 마음도 환경에 적응해갔다.

아침의 잡념은 삼십 분을 넘지 않게 되더니 결국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배낭과 등은 하나가 된 지 오래. 욕심은 내 삶의 무게이니 딱 배낭 크기만큼의 욕심만 허락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한결 마음도 가벼워졌다.

순례길의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들이 더 자주 찾아왔다. 소로가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며 얻기를  원했던 그것- 내면의 성장으로부터 우러나온 기성사회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체류자인 우리는 간밤의 단잠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하늘도 본다. 단순하다!


이른 봄, 복사꽃이 꽃을 피울 준비가 한창이었다. 꽃피는 산골 내 고향에도 같은 꽃이 피었겠지.


카미노를 걷는 순례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발의 물집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순례자들 간의 안부 인사가 '발에 잡힌 물집은 좀 어때?'일 정도로 물집은 카미노에서 생기는 흔한 영광의 흔적이다.

물집은 처음에 생겼을 때는 아픔을 참을 만하다가 크기가 점점 커질수록 그 통증의 강도는 수직 상승하는 특징이 있어서, 생긴 초기에 더 커지지 않게 살살 달래 가며 걸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 물집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카미노 기간 동안 한 번도 물집이 생기지 않은 내 발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직업을 가진 내 발은 정말 단단해서 물집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다고.'

그런 남편의 해석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강원도의 아주 작은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왕복 하루 두 시간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카미노처럼 산 넘고 물 건너서.

열 살 즈음부터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 지게질도 했으니, 어찌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카미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또래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성장 환경이었지만, 크게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자란 것은 분명 가족의 사랑과 자연의 토닥임 덕분이었을 터.

철없던 시절에는 부끄러워 일부러 꺼내보이지 않았던 내 어릴 적 삶이 이 길을 걷기 위해 나를 자립시킨 힘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에 걷는 내내 가슴 뭉클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그 이유가 있다는 말은 진리다.


내 욕심 크기의 배낭
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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