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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04. 2019

지갑을 잃어버린 남자 그리고 두 여자- 믿음, 진실성

산티아고 순례길 세 번째 이야기


"자기! 내가 오늘 저녁 식사에 엊그제 길에서 만나 잠깐 인사했던 그 한국인 친구 세명을 초대했어."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공공 빨래터에 가서 몇 가지 옷을 찬물에 손빨래하고 돌아온 내게 남편이 말했다.

요 며칠 카미노 길에서 잠깐잠깐씩 마주쳤던, 이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국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같은 숙소를 썼던 적이 없어서 대화를 할 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우리랑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를 놓칠세라 남편이 그 친구들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요리하는 것만큼이나 같이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카미노 기간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혼자이거나 아니면 우리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어차피 우리 둘이 먹으려고 요리하나 몇 인분 추가해서 요리하나 별 차이도 없을뿐더러 스페인 식재료는 비싸지 않아서 부담도 없었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도)


간단히 통성명을 마치고 다 같이 식탁에 앉았다.

간간이 얼굴은 마주쳤어도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한 적은 없었어서 그런지 이 세 명의 친구들 얼굴빛이 조금은 긴장된 듯 수줍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국물을 한 모금씩 하고 나자 이 친구들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눈가가 촉촉해졌다.

'와!!! 이건 한국 부대찌개 맛이에요~

 따뜻한 집밥 같은 맛! '

스페인 식재료만으로도 한국 맛을 곧잘 내는 남편의 국물요리에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 이 친구들은 배가 슬슬 불러오는 속도에 맞춰 본인들 이야기를 술술 꺼내 풀어냈다.


24살 동갑내기인 슬기, 지혜, 정현이.

전문대학 졸업 후 사회인으로 2년을 보낸 슬기는 앞으로의 자기 인생을 위한 '자신만의 색깔 찾기'의 목적으로,

지혜는 심상정 국회의원이 예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한 수녀원에서 자원봉사하신 것을 티브이로 보고 난 후 감동받아 무조건 카미노를 해야겠다 마음먹었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고 했다.

정현이는 영어를 잘 말하지 못해도 길 잃을 걱정 없는 카미노를 자신의 첫 번째 해외 유랑의 목적지로 정했고, 오로지 카미노라는 이 목표를 위해 일 년 동안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걷는 동안 셋이 정말 많이 친해졌나 보다. 계속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걸 보면. 그렇지?"

서로 모르는 사이로 시작해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서로 의지하며 함께 걸어온 그들의 모습이 기특하고 보기 좋아서 내가 말했다.

"사실 우리가 계속 같은 숙소에서 만나야만 하는  우리만의 사연이 있어요..."

조용하니 말수가 가장 없던 정현이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점인 생장(St. Jean)에서 처음 만난 이 친구들은 첫날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고 한다. 처음이라는 설렘과 기쁨에 가득 차서 걷는 내내 행복했고, 그 흥분감과 에너지로 충만했던 그 날.

숙소 도착 후, 오전에 길에서 만났던 한국인 아저씨  한분으로부터 같이 나가서 술 한잔 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쉬고 싶어서 사양한 슬기를 빼고 지혜와 정현이는 나가서 마을 구경도 하고 술도 꽤 마시게 되었다고. 너무 즐겁고 새로운 경험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발길을 돌렸는데... 숙소 문이 잠겨서(보통 알베르게 문은 밤 10시에 잠긴다.) 들어가지 못한 채 문 앞에서 노숙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 떠보니 정현이 지갑이 사라졌더라고.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정현이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자책하며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고, 어쩌면 도움을 청해볼만도 했을 그 아저씨는 정현이를 피했고, 보다 못한 슬기랑 지혜가 자신들도 넉넉하게 있지 않은 돈을 아껴 쓰고 정현이에게 나눠주며 같이 걷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한국 가서 갚으면 되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정현이를 위로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조용히 수습하려 했을 정현이에게 이름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슬기랑 지혜가 내민 도움의 손길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일 테다.

애초에 술 마시러 나가자고 제안한 그 아저씨를 이 친구들은 탓했을까?

마치 이 세 명의 젊은 친구들에게 벌어진 일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것도 같아 씁쓸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와주며 도움받는 이 진실한 청년들의 모습에서 희망의 빛도 엿볼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난 비슷한 크기의 사이 좋아보이는 나무들이 서로 힘이 되어주는 그 세 친구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 날 이후 한번 더 지혜랑 정현이를 같은 숙소에서 만났다. 바람이 많이 불고 몹시 추웠던 날이라 몸이 힘들었던지 지혜는 우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수고했다고 토닥토닥해주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난 후 지혜가 내게 물었다.

"언니~왜 순례길에서 만나는 외국인(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중국어로 인사하는 걸까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중국인처럼 보이는 건가...?!"

카미노에 중국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때라,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카미노에서 마주치는 동양인은 한국사람이라는 걸 알던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지 싶어서 지혜에게 물어봤다.

"그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하며 인사했는데?"

지혜가 말하길,

"챠오~~라고 자꾸 하길래,

는 계속 노~~ 아임 낫 차이니즈!라고 답했어요."

마음씨 착하고 순수한 지혜에게 한 가지 매력이 추가되었다. 귀여움!^^

'Ciao(챠오: 이탈리아어권에서 주로 쓰는 인사.)'

대답도 똑같이 Ciao~하면 되는데...

지혜는

'Ciao~~'

'No~~ I'm not Chinese!'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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