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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06. 2019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효심, 가족애

산티아고 순례길 네 번째 이야기


3월이 마지막 날을 향해가고 있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지대가 높은 곳이 아닌데 예상치 못하게 내린 눈에 봄꽃들과 녹색의 어린 식물들은 헷갈려했고, 그들 옆을 걷는 순례자들은 당황했다.

아침에 출발한 곳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었는데   걷다 보니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걷기는 무리겠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차에 다행히 작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언 몸도 좀 녹일 겸 항상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감동을 주는 스페니쉬 커피도 한잔 할 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순례자들로 카페 안은 북적북적했다. 다들 젖은 겉옷과 신발을 말리느라 벽난로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아낌없이 자기 몸 불살라 주는 장작들 덕분에 카페 안은 따뜻했다. 이 따뜻함에 마음이 녹아내려 여기서 하루 묵어가기로 결정했다. 스케줄에 여유가 있던 우리는 날씨가 좋을 때 좀 더 걷고,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일찍 멈췄다.

보통 카미노 길에 있는 카페들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들의 숙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커피 마시러 들렀다가 그곳 분위기와 주인 분들이 마음에 들면 우리는 거기에 그냥 눌러앉곤 했다.


Ventas de Nàron (벤따스 데 나론)

아직 알베르게 문을 열 시간은 아니어서 카페에서 간단한 음식을 시킨 후 시간을 좀 더 보냈다. 혹시나 주인 분들 일하시는 데 방해될까 싶어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우리는 시간 많으니 숙소 문은 천천히 열어주셔도 된다.'는 말도 전했다.


한동안 벽난로 앞을 전세 냈던 예닐곱 명의 이십 대 순례자들이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열두세 살쯤 보이는 아이들 그룹(열명이 넘는 수)이 두 명의 지도 선생님과 함께 카페로 들어섰다. 아일랜드에서 수학여행의 일환으로 왔다는 이 아이들은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이었지만, 아이들 답게 여전히 신난 표정이었다. 심지어 반바지를 입고 있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는데 추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듯, 서로 수다 떨기에 바빴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되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생님.

아무리 늘 바람 불고 비 많이 오기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일지라도, 날씨 좋기로 소문난 스페인에서 이런 혹독한 날씨를 만나게 되니 당황스러웠을 테다. 그런 연유에서 인지, 선생님 한 명이 연신 카페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자 직원에게 콜택시를 불러줄 것을 요청 아니 요구했다. 안 그래도 갑자기 들이닥친 수많은 순례자들로 인해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그 여자분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날씨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듯, 불러도 오지 않는 택시도 그 여자 직원의 잘못이 아닌데.

'더 좋은 말로 부탁해도 되었을 일을...' 그러지 못한 그 선생님의 2% 부족한 예의가 안타까웠고, 그걸 다 받아내느라 거의 울상이 된 그 여자 직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손님이 거의 다 빠지고 난 후, 우리는 그 직원에게 많이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제야 웃어 보이던 그녀의 이름은 라우라(Laura). 부모님을 도와 카페와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스물다섯의 아가씨 다.

스무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의

영화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 1993년 제작된, 빌 머리 주연의 영화로 기상캐스터인 주인공은 타임루프에 갇힌 채 자고 일어나면 같은 날, 같은 시간을 맞이한다.)'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이 몸에 부칠 법도 한데, 라우라는 효심 가득한 말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사실, 손님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어. 최근엔 탈모 증상도 나타나고 있고.

그렇지만, 나는 아직 젊고 부모님보다 체력도 훨씬 좋아. 그러니 사람을 상대하는 이런 감정노동은 내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님이 평생 이 일을 하시며 나를 키우셨듯이, 앞으로는 내가 부모님 짐을 덜어드리며 봉양할 거야. 그게 자식 된 도리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잘하고 있다고. 대견하다고.

본인이 나고 자란 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라우라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하늘 높이 자랄 것이다. 땅에서 높이 자라나 열매를 맺고 귀한 대접을 받는 큰 나무처럼, 라우라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함박눈이 내려도 많은 순례자들은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카미노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극대화된다. 그럴 수도 있다고.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인다.


아주 작은 마을인 벤따스 데 나론은 순례자들에게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지 하룻밤 묵어가는 곳은 아닌 까닭에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숙소엔 우리 부부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는데 몇몇 순례자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영국에서 온 휴(Hugh), 소피아(Sophia), 윌리엄(William) 가족.

아버지 휴의 68세 생일을 맞아, 자식 둘이 휴가를 맞춰서 일주일간 카미노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궂은 날씨에 거의 30km 가까이를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 이 가족은 힘든 기색 없이 여전히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이 와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며 우리도 덩달아 더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 가장 큰 울림을 준 소피아의 말.

"눈발이 막 날리기 시작하는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사방이 눈으로 덮이면서 길에서는 오직 우리 셋의 모습만 보이더라고. 조금 지치는 것 같은 아버지를 중간에 세우고 윌리엄이 앞에서 끌고 내가 뒤에서 아버지를 밀면서 걸었어. 신나는 노래도 불러가며 이 눈보라 따위는 우리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듯 즐겁게 걸었어. 그러면서 아버지한테 말했지. '아빠가 우리 어렸을 때 가기 싫다고 해도 늘 끌고 등산을 갔던 것처럼, 우리도 아빠가 싫다고 해도 같이 걸을 거야. 그게 아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삶이니, 우린 배운 대로 돌려줄게.^^'"


부모님은 자식에게 거창한 효도를 바라는 게 아닐 테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걷는 그 행위 자체가 효(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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