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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07. 2019

나만을 사랑한 나쁜 놈- 정직, 솔직함

산티아고 순례길 다섯 번째 이야기


몇 해 전 이맘때쯤이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흙길에서 푸석푸석한 먼지가 일었다. 26km가 넘는 오르막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좁은 산길에 순례자들로 줄이 만들어질 정도로 걷는 이가 유독 많은 날이었다. 앞에 걷는 사람이 일으킨 먼지를 고스란히 마시며 걸었더니 목이 쉬 말랐다. 가지고 있던 물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쯤 다행히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아담한 크기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어 쉴 수 있겠'는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런 마음은 다른 순례자들도 같았던지, 마치 결승선을 눈 앞에 둔 마라토너처럼 뛰는 순례자들도 몇몇 있었다. 다들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힘들다고 아우성인 허벅지 근육을 한번 더 강하게 쥐어짜고 있었다.

가이드북에 표시해놓은 여덟 명만 묵을 수 있다는 숙소는 마을 중턱에 위치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순례자들이 몰렸던 시간이라 그곳에 남은 자리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산길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만큼이나 마음도 급해졌던지, 그냥 눈 앞에 보이는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크고 화려한 외관을 한 숙소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숙소 앞에 세워둔 사람 키보다 큰 광고판에 붙여진 사진들이 지친 순례자들을 유혹하기 충분했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에 발을 들였다.


Foncebadon(폰세바돈)

무뚝뚝한 주인아저씨의 안내를 받으며 침대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널찍하니 탁 트인 뷰를 자랑하는 레스토랑 공간을 뒤로 한채 우리를 계단 아래 지하실로 인도하는 아저씨.

좁은 복도를 지나 들어선 좁디좁은 방에는 이층 침대 여섯 개가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방 옆에 자리한 샤워실에서 뿜어져 나온 뿌연 수증기와 지하실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우리의 신중하지 못한 선택의 끝이 이런 것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래도 누울 자리가 있는 게 어디야?! 어차피 피곤해서 누우면 바로 아떨어질 테니 상관없어.'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남편은 아래층 침대에 나는 위층 침대에서 침낭 속으로 몸을 넣었다.


'따다닥... 따다닥...'

'악'

침낭 밖으로 빠져나와있던 내 왼쪽 팔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났다. 그 반응은 빛의 속도로 내 감각 신경을 타고 흘러 외마디 비명으로 이어졌다. 피부에 불이 난 듯 뜨거워지더니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스테로이드 연고를 얼른 바르고 나서 다시 잠을 청했는데,

'따다닥... 앗!'

이번에는 왼쪽 뺨에서 순식간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구 가려웠다.

모두가 잠들어 있던 그 시각. 다른 사람들이 깰까 봐 조심하며,  남편에게 몸짓으로 사인을 보낸 후 같이 방 밖으로 나갔다.

"나 아무래도 나쁜 놈한테 물린 것 같아."

팔과 얼굴에 일자로 난 세 개의 물린 자국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내가 말했다.

화가 난 남편은 계단을 급히 올라가 레스토랑 카운터에서 그날 매출 정산을 하고 있던 주인아저씨에게 그래도 정중하게 말했다.

"내 부인이 베드 버그(bed bug)에 물린 것 같아요. 좀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웬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아저씨가 무성의하게 내 피부를 관찰하더니, 내 침낭을 좀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침낭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면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 숙소로 오기 전에 어느 마을, 어느 숙소에서 머물렀어요?"

이건 또 무슨 귀신 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보다 어른이 묻는 말이니 감정 아껴가며 아저씨 질문에 어디 묵었었다 대답했다.

아무리 찾으려고 애써도 내 침낭에서 아무 단서도 나오지 않자, 포기한 아저씨는 우리더러 다시 들어가서 자라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리고서는 자리를 떠났다. 자기 집에는 베드 버그가 없으니 내가 어디서 내 몸에 달고 왔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우리에게 방을 바꿔 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다른 숙소들도 모두 문을 걸어 잠겄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노숙하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던 우리는 그냥 참고 각자의 침대로 돌아가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누군가의 낮은 알람 소리에 침낭 속에서 쥐 죽은 듯 자고 있던 사람들이 꿈틀꿈틀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른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밤새 한숨도 못 잔 나는 이제 이 기분 나쁜 지하 공간과 그 못된 베드 버그와 그리고 불친절한데 무례하기까지 한 주인아저씨를 다시는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간밤에 베드 버그에 물린 사람 없어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눈 밑이 검게 변한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남편은 같은 방에 묵은 사람들 중에 벌레에 물린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아무도 없었다. 열두명이 한 방에서 잤는데 나 혼자만 베드 버그에게 열심히 헌혈을 한 모양이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눌 이 없구나...' 하며  멍하니 새하얀 벽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

벽에 갈색의 작은 생명체가 기어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그 나쁜 놈- 나만 물은 베드 버그'였다. 빈 플라스틱 물병에 몇 마리를 집어넣었다.


숙소를 나오는 길에 카운터에 들러서 베드 버그가 들어있는 플라스틱병을 주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는 그의 책 <연을 쫓는 아이>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할 때, 당신은 타인의 진실에 대한 권리마저 빼앗는다. (When you tell a lie, you steal someone's right to the truth.)'

정직하지 못했던 그 주인아저씨는 나를 속이려 했지만, 나는 진실에 대한 권리 행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다른 순례자들에게는 이러지 말라는 간결한 충고를 남기고.


거짓을 말하는 악한 마음이 삽으로 떠서 버려질 수 있기를...


그 일이 있고 난 지 일주일이 넘은 어느 날 카미노.

6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The monastery of San Julián de Samos)이 있는 사모스(Samos)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후에 잠깐 쉬려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려는데 베드 버그 한 마리가 이불에 붙어있는 게 보였다. 남편이 카운터로 가서 숙소 주인아주머니에게 베드 버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주인아주머니는 한걸음에 우리 방으로 달려와 우리 배낭을 들어 다른 방으로 옮겨주셨다. 정말 미안하다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진짜 마을 사모스, 그리고

백여 년이 넘게 버려졌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 순례자들을 상대로 한 경제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 폰세바돈.

아무리 돈을 목적으로 한 가짜 마을일지라도, 그곳에서 순례자들을 맞는 사람들의 마음만은 진심이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황량한 풍경의 폰세바돈 그리고 오랜 역사의 사모스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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