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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13. 2019

닫힌 문을 열어준 그들- 감사함, 인간애

산티아고 순례길 일곱 번째 이야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질지 아니면 잠깐 내리고 말지 지켜볼 겸, 점점 요란해지는 주린 뱃속도 좀 채울 겸 카페에 들어갔다.

¡hola!  카페 사장님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창가 쪽 자리로 발을 옮기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머!!!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너무 반가운 나머지 큰소리로 튀어나온 우리말.

며칠 전에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지희, 민수 커플을 다시 만났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보다 일찍 숙소를 나서며 공동부엌 식탁에 자신들이 먹으려고 준비했던 아침식사의 반을 덜어서 우리를 위해 남겨주고 간 커플. 피곤했던 남자 친구가 밤새 코 골아서 미안했다는 메모 위에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통조림과 믹스커피를 놓고 간 커피만큼 달달하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 콩 한쪽도 나눠먹는 그들의 정(情) 덕분에 그날 하루 종일 힘이 났었는데 그런 그들을 우연히 다시 만난 거였다. 그때 못한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탓에 서둘러 카페를 나와 다시 길 위에 섰다.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지점에서 만났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지희, 민수 커플은 9km의 오리지널 길을, 우리 부부는 전에 가보지 못한 5km 거리의 대체 길로 들어섰다.


Calzada del Coto(칼사다 델 코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도착한 마을에 있는 유일한 공공 알베르게 문을 힘껏 당겼다. 당기는 게 아니고 밀어야 되는 문인가 싶어 다시 힘껏 밀었다.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이 사나운 날씨에 흠뻑 젖은 몸을 더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도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더 안전한 길로 갈걸 괜히 다른 길로 왔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애써 온 길을 돌아갈 수도 없고, 다음 마을을 가려면 7km를 더 걸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제대로 끼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일에 맞닥뜨려질수록 이성의 힘을 풀가동해야 한다' 주의인 우리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2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주민센터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주민센터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힘든 상황에서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우리가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봐야 했다.


10분 정도 마을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주민센터로 짐작되는 건물이 보였다. 닫힌 창문 너머로 몇몇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곳에 계신 분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설명했다.

'걱정 마! 별 문제 아니야.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마.' 마을 대표인 파코(Paco) 아저씨가 비에 젖은 생쥐 꼴의 우리를 위로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통화를 하는 도중에 파코가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구십도 배꼽인사를 하고 주민센터를 나서려는데 파코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카모마일 차 티백과 초콜릿을 우리에게 건네며, 알베르게까지 차로 데려다주시겠단다. 흠뻑 젖은 몸으로 차까지 얻어 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큰 신세를 졌다. 이 끝없는 호의를 갚을 길이 없다 생각하고 있는데 파코가 우리에게 말했다.

"악천후를 뚫고 이곳까지 걸어온 너희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감동이야. 너희의 그 포기하지 않은 열정과 용기에 대한 값을 정당하게 받는 거라고 생각해. 너희는 우리에게 빚을 진 게 아니야.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했어."


알베르게에 무사히 짐을 풀고 나서 쉬고 있을 때,

파코 아저씨가 우리를  찾아오셨다. 젖은 신발 안에 넣으라며 신문지 한 다발과 옷을 말리라며 라디에이터(난방 기기) 하나를 손에 들고 오셨다.

이 분은 무너진 줄 알았던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알뜰살뜰 챙겨주신 파코 아저씨의 심장은 분명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리.


Poblacion de Campos(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간밤의 고요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침부터 바람의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허공을 날던 새들은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헛날갯짓만 하고 있었다. 우리 앞을 걷고 있는 두 명의 일본 청년들은 자신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고깔 모양의 대나무 모자를 어찌하지 못해 난감해했다. 모자를 들고 가자니 모자가 바람에 걸려 팔이 뒤로 사정없이 꺾였고, 쓰고 가자니 모자에 바람의 저항이 맞닿아 몸이 뒤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모자를 포기할 법도 한데, 전날 저녁 같은 숙소에 묵었던 순례자들에게 그 모자가 자신들이 일본인임을 상징하는 징표라 말한 터라 버릴 수 없었을 거다. 너무 거창한 의미부여로 인해 모자가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작은 캡 모자를 쓴 우리도 결국엔 모자를 벗어야 했다. 한 시간에 2km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일단 좀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마을 입구에 위치한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보는데 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안보였다. 카페 앞에 펼쳐진 널찍한 잔디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어린 나무들은 뿌리가 뽑힐 듯 휘청거렸다.

'어떻게 걷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나 보다. 그 모습을 본 주인아주머니께서 우리 더러 오늘 그만 걷고 싶으면 본인 알베르게에서 묵어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보통 알베르게 문은 빨라야 1시 30분에 여는 게 보통이라 그렇게 이른 시간에 순례자를 받아주는 숙소가 원래는 없다. 그래서 오전에 걷는 행위를 멈추기는 어렵다. 자의로 멈추고 싶어도 타의에 의해 걸어야 하는 게 보통이다.


'클라라'아주머니의 통 큰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인 후, 염치 불고하고 그 이른 시간에 숙소로 발을 옮겼다.

카페 옆에 자리한 최신식 알베르게였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알베르게계의 아이돌이라 불러도 될 수준의 인테리어였다. 삐걱거리는 이층 침대 대신 각 칸이 나누어진 침대 안에는 개인용 램프와 커튼이 달려 있었다.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니 창문 너머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이렇게 호텔 같은 숙소의 숙박료는 참 착하게도 10유로였다. 멈추길 잘했다. 멈출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했다.


쉼 없이 부는 바람이 몰고 온 추운 기운과 싸우느라 숙소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난방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우리가 지불한 숙박비로는 전기료도 감당 안될 듯 보였다. 클라라 아주머니가 불편한 것 없는지 우리를 살피러 오셨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 난방기는 꺼달라고 말씀드렸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소리야?" 클라라가 말했다.

"저희 둘 때문에 이 넓은 공간을 다 데우는 게 너무 낭비인 거 같아서요."

우리는 침낭도 있었고, 숙소에는 각 침대마다 두꺼운 담요도 놓여있었다. 이것들로도 충분할 거 같았다. 그런 우리의 미안한 마음을 읽은 눈치 빠른 클라라가 엄마 같은 미소로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와줘서 우리가 여기에서 먹고사는 거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쉬다 가. 내가 뭐 공짜로 너희를 받아준 것도 아니잖아?!

바람 부는 데 오느라 수고 많았어. 푹 쉬어."



'비가 오면 첨벙첨벙 노란 장화를 신을 수 있어서 좋고, 바람 불면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릴 수 있어서  나는 좋아.'라는 유아용 그림책 내용이 생각난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에게는 이래도 좋고 저러해도 좋은 삶인데, 우리 어른들은 그런 긍정의  마음을 잊은 지 오래다.

비와 바람을 맞으며 걸어야 했을 때는 동화책 내용처럼 순수하게 즐거울 수는 없었지만,

비바람 뚫고 만난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아낌없는 사랑 덕분에 나는 좋았다.

감사하게도, 순례길에서는 '이 개떡 같은 날씨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느냐'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보다는 '이런 궂은 날씨에도 가야 할 길 가는 너희들이 참 장하다'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날씨가 안 좋을수록 많았다.

이런 따뜻한 인간애에 중독되어 우리는 자꾸 그 길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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