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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22. 2019

돌아가고 돌아오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산티아고 순례길 여덟 번째 이야기


남편이 울고 있었다.
공공 샤워실에 들러 씻고 나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벙크 베드 아래 칸에 웅크리고 앉아 넋이 나간 채로 남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그 당시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문명의 이기를 보는 순간, 방금 마친 따뜻한 샤워의 온기는 얼음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대. 우리 당장 떠나야 해'

올 것이 왔구나.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순간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남편에게는 아빠 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외할머니 남동생인 할아버지는 비혼 주의자였고, 남편을 늘 아들처럼 챙겨주셨었다.

몇 년간 암과 싸우고 계셨기에 언제든 마지막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먼 곳에서 그 날을 맞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미노를 시작한 지 딱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내 생애 이보다 더 고요해서 행복했던 날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걸은 아침이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과 시골길의 한적함에 취해 특별한 종교가 없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인사를 신께 하고 있었다.
'더 주지 않으셔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합니다.'

많은 것이 필요 없는 소소한 행복의 맛을 막 보기 시작했고,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도 참 괜찮은 삶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랬던 그날. 운명의 신은 삶이 그리 단순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며, 나를 우리를 잔혹한 현실 속으로 돌려보냈다.


남편에게는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가족사가 있다. 처음 남편이 내게 그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놓았을 때 나는 '소설 쓰지 말라'며 장난처럼 웃고 넘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허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꺼내보기엔 너무 무거워서 못 들은 척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 같은 이야기의 중심에 남편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할아버지는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분이셨다. 자식이 없었기에 가족들 중에 한 명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셨고 그게 남편이었다고... 가족들은 그렇게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남편과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늘 남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둘이 작정하고 파놓은 함정에 남편은 아주 깊이 빠졌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들이 벌인 살벌한 게임에서 우리는 힘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패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돌아가신 날로부터 3개월 후로 정해졌고, 우리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마다 머물렀던 집에서 우리는 쫓겨났다.


그 후로 7장의 달력이 힘없이 넘어갔다. 남편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에 아파했었고,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좌절했었다.


중심축이 떨어져 나간 모빌처럼 작게 이는 바람에도 부르르 떨곤 했던 우리의 영혼에 따뜻한 손길을 보내준 것은 카미노였다. 내가 위로해줄 테니 돌아오라며 그 길은 갈 곳 잃은 우리를 불렀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럴 때 모든 것이 다 흔들려도 정신만 똑바로 잡고 있으면 된다'라고 순례길은 말해주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자꾸자꾸 걷다 보면 헤집어진 마음도 다시 제자리를 잡고 더 단단해질 거라며 카미노는 그렇게 우리를 달래주었다.

'내 항상 여기 있으니 언제든 힘이 들면 돌아와서 내가 들려주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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