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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28. 2019

카미노는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준비성, 비움의 미학

산티아고 순례길 아홉 번째 이야기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사방이 자욱한 안개로 덮여 있었다. 잠이 덜 깬 듯 흐릿한 시야를 이끌고 앞에 걷고 있는 순례자의 배낭에 덧씌워진 형광색 레인커버만 뚫어지게 보며 걸었다. 길을 헤맬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마구 흩뿌려진 잡념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내려앉아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작정하고 길을 잃으려고 해도 잃기 어려운 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카미노의 상징인 노란색 화살표마저 삼켜버린 안개였고 그런 안개를 닮은 내 마음이었다.


Cruz de Ferro (Iron Cross: 철의 십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철의 십자가 (Cruz de Ferro)'가 자리하고 있다. 해발고도 1500m의 땅 위에 5미터 높이의 막대기를 기둥 삼은 그 십자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발아래 돌무더기를 내려다본다.

세계 곳곳에서 온 순례자들이 형형색색의 배낭 속에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 지녀온 돌들이 수 세기에 걸쳐 십자가 아래 쌓여왔다.


'카미노는 집(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Camino begins at home.)'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철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갈 돌을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카미노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이 지어질 당시, 순례자들이 돌을 가져옴으로써 성당 건립에 공헌했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 순례가 시작되는 곳에서 준비해서 가져온 돌을 배낭에서 꺼내어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가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순례길을 걷는 내내 무겁게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홀가분했을 그 행위에는 다양한 의미와 동기가 부여되었을 테다.

어떤 이는 사랑의 노래를 돌 위에 새겨와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또 다른 이는 막 끝난 연애의 상처를 묻어두고 갔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글도 있고, 먼저 저승으로 떠나보낸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고 가는 이도 있다. 다니던 직장을 자의로 또는 타의에 의해 그만두고 온 많은 이들은 백수라는 마음의 짐을 등 뒤로 던져버리고 길을 다 걷고 난 후에는 전보다 더 좋은 일터에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인간의 미약한 힘으로는 헤쳐 나올 수 없는 희뿌연 안개에 몸과 마음이 포획당했던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채 돌 언덕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순례자들처럼 언덕 중앙으로 올라가 막대기라도 잡고 기도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한 발도 떼지 못한 채로 발을 디딘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그대로 서 있었다.

<무진기행>이 안개 같은 허무로 시작하여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으로 끝났듯, 내 머릿속에도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근심이 그리고 울화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돌멩이라는 매개체에 옮겨 담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너무 일렀는지 응축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마음이 전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두 해가 지났다. 다시 찾은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기도를 하지도 않았다.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어도 힘든 상황 속에 갇힐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세상으로부터 배운 후, 방향을 틀어잡은 바람이 내 안에 가득 찼던 안개를 서서히 걷어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돌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안개가 자욱했던 날엔 선명하게 보였던 십자가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날엔 파랗게 눈부신 하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갑갑한 날 신을 찾고 맑은 날은 그러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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