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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Oct 30. 2019

스페인 하숙 촬영지에서 만난 그녀- 학구열, 책을 쓰다

산티아고 순례길 열 번째 이야기


올 초에 지인들로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에 한국의 한 방송팀이 알베르게를 열고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방송을 볼 때마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러 번 돌아간 우리 부부 생각이 났다며 여러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아쉽게도 아직 기회가 없어서 그 예능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프로그램이 촬영되었던 그 마을에서 4년 전 우리가 겪었던 운명 같은 경험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한자리 제대로 차지하고 있다.


Villafranca del Bierzo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알베르게 공동 부엌에서 이른 저녁을 준비하는 남편의 손길이 분주했다. 카미노 기간 동안 보통은 로컬 식당에서 그날의 메뉴(Menu del dia)를 사 먹곤 했는데, 그러다가 가끔 운 좋게 주방시설이 잘 갖춰진 숙소에서 묵게 되는 날에는 그 동네 마트에 가서 그곳 식재료를 산 후 남편이 자신만의 퓨전요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다른 순례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남들보다 한두 시간 일찍 요리를 하는 것 또한 몸에 밴 남편의 스타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남편은 요리 삼매경에 빠져있었고, 나는 부엌 테이블에 앉아 마늘을 까면서 보조셰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음~~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들어왔어. 무슨 요리 하고 있는 거야?"

우리 부부만 있던 부엌에 한 여인이 익숙한 곳인 듯 발을 들이며 넉살 좋게 말을 걸어왔다.

"이름하여 '내 맘대로 수프'랑 미트볼 파스타 요리하고 있어. 메뉴가 마음에 들면 같이 먹자. 아주 많이 요리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저녁식사 같이 하자."

남편 역시 어색하지 않게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좋아! 초대해줘서 고마워.

그건 그렇고 이 가이드북 어때?"

우리가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카미노 가이드북을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아주 좋아! 산티아고 순례길에 필요한 핵심 정보들이 군더더기 없이 집약되어 있는 데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크기라서 더 좋아.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오랜 시간 공부하는 마음으로 본 책은 아마 이게 처음일 거야!"

 웃으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럼 저녁식사 때 만나! 나는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올게."

한 시간 후에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을 한 후 그녀는 부엌을 나갔다.


와인을 사들고 돌아온 그녀의 이름은 코르둘라 라베(Cordula Rabe). 독일 출신인 그녀는 카미노, 그리고 이 나라와 사랑에 빠져서 스페인 남부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그녀의 열정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다시 돌아올 만큼 카미노를 사랑했던 우리 부부와 코르둘라는 순례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아까 내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던 그 책...

사실은 내가 쓴 거야."

코르둘라의 이 한마디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막 입에 넣으려던 국물이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입가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오 마이 갓! 정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름 쉬 흥분하지 않는 성격이라 자부했던 내가,

모 제약회사 세미나에 나온 차승원 씨와 악수하고 기념사진 찍었을 때도 떨리지 않았던 내 손과 심장이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 앞에서 마구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을 가장한 인연이 있단 말인가?!

사실 나는 그녀가 쓴 가이드북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고 틈만 나면 남편에게 이 책을 번역해서 한국인 순례자분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때 당시에 카미노에서 만난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종류의 가이드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점인 생장에서 무료로 나누어주었다는 '미쉐린 가이드 복사본(A4용지를 묶은 것으로 기억된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사 온 정사이즈 가이드북이었다. 복사본은 빗물에 젖고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고, 작가분들의 영혼이 깃든 정식 출판물은 안타깝게도 너무 크고 무거워서 오랫동안 길을 걸어야 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짐처럼 느껴진다고들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다닌 그 가이드북을 볼 때마다 부럽다고 했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나는 우리만 누리는 것 같은 호사가 미안하기도 했고, '좋은 건 나눌수록 더 좋다'는 마음에 시도 때도 없이 스페인어에 능통한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같이 책 좀 번역하자고 했던 거다.

'스페인어로 쓰인 그 책을 번역하려면 가장 먼저 책을 쓴 작가분과 연락을 취해야 한다.'라고 그날 오전에 길을 걸으면서 남편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떻게 그날 오후에 그녀를 그곳에서 만난 것이었다.


이러했던 상황을 코르둘라에게 설명했더니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본인 책에 대한 우리의 애정에 깊은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코르둘라도 처음에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했다. 독일인인 그녀가 십여 년 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무작정 걷다가 눈 앞에 보이는 알베르게에 그냥 들어갔다고 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심정으로 본인이 직접 가이드북을 썼다고 했다.

요즘에는 알베르게도 다른 숙소들처럼 별(star)로 등급이 매겨지고, 해마다 늘어나는 순례자들의 수만큼이나 새로 문을 연 알베르게들도 많아져서 매년 책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좀 전에도 새로 생긴 숙소들을 둘러보고 왔고 요즘은 자전거로 달리는 순례길 가이드북을 준비하는 중이라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세월이 흘러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순례길과 대조적으로 그 길 위에 선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두발로 걷던 사람들은 이제 자전거로 달리고, 귀곡산장 같았던 오래된 알베르게들은 호텔식 숙소로 환골탈태 중이며, 예능 프로그램에는 절대 문을 열어줄 것 같지 않았던 그 오래된 옛 수도원의 문도 활짝 열렸다.

옛날 모습 그대로를 그리워하며 이런 급격한 변화가 싫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든 것은 변해도 그 길을 사랑하는 마음만 한결같아도 괜찮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코르둘라의 발 빠른 적응력과 변화의 속도에 자신을 맞춰 새로운 창작의 길을 가고 있는 그녀의 융통성에 큰 경외심과 칭찬을 보낸다.


너무 열심히 보고 또 봐서 너덜너덜해진 첫 번째 산 가이드북(우린 같은 책을 두 번 샀었다)과 운명같았던 작가와의 만남

그 날 이후로 코르둘라와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그녀의 책 번역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던 작가의 생각과는 다르게 책에 대한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책 번역에 대한 내 꿈은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나만의 글을 쓰라는 하늘의 깊은 뜻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나는 내 글을 쓸 운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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