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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Nov 01. 2019

카미노의 봄 그리고 가을- 한결같음, 일관성

산티아고 순례길 열한 번째 이야기

 

간밤에 쉬지 않고 불어온 바람에 절정을 향해 빨갛게 물들어가던 단풍잎들이 스르륵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짧고 강렬하게 자신을 불살랐던 잎들은 아직은 푸르름을 잃지 않은 잔디밭에 내려앉아 긴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른 봄부터 쉼 없이 부지런히 자신을 피우고 태웠을 단풍잎은 이제야 좀 오랫동안 쉬어갈 수 있겠다며 편안한 모습이다. 이제 더는 옆에 붙은 이파리보다 더 많은 햇빛과 양분을 얻으려 경쟁할 이유도, 쉬도 때도 없이 부는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어 참 다행이다.


고운 가을 풍경이 차가워지는 공기에게 바통을 넘기려는 이 순간이 못내 아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인간의 외로움이지 자연의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늘 스스로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으니.


카미노의 봄

밭두렁에 살짝 고개를 내민 개나리를 닮은 이름 모를 꽃의 모습이 수줍다. 점점 더 따뜻한 빛을 발산하는 봄 햇살이 아직은 일어나기 싫다며 툴툴대는 얼은 땅을 간지럽히니, 더는 참지 못하고 깨어난 대지가 쭉쭉 기지개를 켜는 모양인지 땅 위로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피어오른다.


푸릇푸릇 싱그러운 새싹으로 한상 거하게 차려진 풀밭에서 양들은 봄맞이 파티가 한창이다.

올 한 해도 질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덩굴을 손보는 농부들의 움직임이 바쁘고, 작년 가을 묵혀둔 거름을 트랙터에 실어 나르는 농부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순례길

양 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목장에서 소 먹이 풀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방금 막 끼얹어진 시큼한 거름냄새가 봄이 왔음을 알린다.


카미노의 봄 날씨는 변덕스럽지만 살갑다.

긴 겨울을 참아내고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꽃들 위로 날리는 한발 늦은 눈발은 모두를 설레게 하며 환영인사를 받는 첫눈과는 다르게 '파티풉퍼(party-pooper: 흥을 깨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푸대접을 받지만, 잠시 잠깐 머물렀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모두에게 쉽게 용서를 받는다.

거칠게 한바탕 쏟아지는 비는 땅에 스며들어 이제 막 싹을 틔운 식물의 젖줄이 되어줄 테니 이 또한 반갑고, 잠깐씩 거세게 부는 바람은 그 뒤에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매달고 있기에 면죄부를 받는다.


이제 막 문을 열고 새해의 새로운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알베르게 지킴이들(hospitalarios)의 얼굴 표정은 겨우내 쌓였던 먼지를 막 털어낸 담요처럼 산뜻하다. 그들은 한동안 쓰지 않아 근질근질했던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여가며  길 걸어온 순례자들과 긴 수다를 떨고 숙소 이용 설명을 더 친절하고 살뜰하게  준다. 

부활절(Semana Santa)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카미노의 비수기라 할 수 있어서 문을 연 알베르게 수가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수 또한 적어서 경쟁 없이 편안하다. 영하의 공기는 베드 버그를 침대에서 몰아냈고, 많은 순례자들이 거쳐가기 전의 알베르게는 일 년 중 가장 깨끗한 모습을 뽐낸다.



카미노의 가을

지나는 길마다 먹거리 천지다. 가로수처럼 자라는 호두나무와 밤나무에서 연신 잘 익은 알맹이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그 떨어지는 속도를 사람이 줍는 속도가 못 쫓아갔는지, 순례자들 발에 밟히고 지나가는 차바퀴에 눌린 호두, 밤이 지천으로 널렸다. 그 버려지는 것들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눈치다. 그만큼 그곳엔 견과류가 차고 넘친다.

밭두렁 사이에도 풍요로움이 한가득이다. 연녹의 또는 진한 보라색의 실한 포도송이들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린다. 마치 대형마트의 과일 코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요가 카미노의 가을을 장식한다. 라즈베리, 블랙베리, 무화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자라는 자연의 산물들만 먹으며 걷는 방법'에 관한 책이 있을 만큼 그곳의 가을은 순례자들에게 아낌없이 자신들의 것을 내어준다.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몽골에서는 말이 살찌고 북부 스페인에서는 돼지와 양이 토실토실해지는 가을이다. 도토리와 밤을 먹고 자라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그곳 가축들은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주인들의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안겨준다.


온화한 날씨가 지속되는 가을에는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런 만큼 좋은 숙소를 선점하려는 순례자들의 보이지 않는 레이스가 펼쳐지곤 한다.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이른 오후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시간까지 알베르게 지킴이들은 쉴 틈이 없이 사람들을 맞는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입술은 메말라있다. 장황했던 숙소 사용법은 한 문장으로 짧게 설명하고 끝이다. 어서 추운 겨울이 돌아와 잔디밭에 내려앉은 낙엽처럼 편안히 등 눕히고 쉬고 싶은 마음이 그들의 충혈된 눈동자를 통해 전달된다.



4년 전 이른 .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많지 않았던 그때 아주 작은 마을에 위치한 알베르게에서 묵었었다. 우리 부부가 유일한 게스트였던 그곳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윤기 자르르 흐르는 따뜻한 닭다리 요리를 저녁으로 준비해주셨는데 인생 최고의 치킨 요리로 기억될 만큼 훌륭했었다. 그 맛에 끌려 그로부터 2년 후 가을에 그 집에 다시 머물렀었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는 테이블에서 마주한 여섯 명의 다른 순례자들에게 2년 전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아주 맛있는 음식이 나올 거라며 그들을 잔뜩 기대하게 만들었는데...

저녁식사가 나오는 순간 우리 부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 만들어 둔 요리인지 알 수 없게 퉁퉁 불어 터진 면발 위로 차갑게 식은 토마토소스가 대충 끼얹어진 파스타를 너무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울며 겨자 먹듯 그냥 식도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다짐했었다. '다시는 내가 했던 단 한 번의 경험에 대해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실수는 범하지 말자'라고. 예전에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기대와 예측은 위험하고 일방적일 수 있음을 그때의 경험에서 배웠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한결같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슬퍼지려는 내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자연 그리고 계절이다. 그것들은 일관되게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돌아간다. 참 한결같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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