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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Nov 08. 2019

은퇴 없는 삶- 이타심, 나눔의 미학

산티아고 순례길 열두 번째 이야기


밤새 조용히 눈이 내렸다. 제 할 일을 다한 듯 고개를 숙인 채로 졸고 있는 진갈색 해바라기 머리 위에 새하얀 눈 모자가 씌워졌다. 곱슬곱슬한 수국 머리 위에도 희끗희끗 눈발이 내려앉았다.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아휴... 벌써 겨울이 오고야 말았다'며 한숨짓게 하는 애물단지 눈이,

이곳에 잠깐 머물다 갈 내게는

'와우~~ 몇 년 만에 보는 제대로 된 눈이냐'라고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같은 풍경이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오늘이다.


일 년에 딱 한번 열린다는 이곳 로컬 교회 바자회에 다녀왔다. '봉지 한가득 중고책을 담아 2달러'라는 사인을 발견한 내 눈과 손은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죄다 영문 책이라 내가 즐길 만한 책이 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작가의 작품과 내 관심 분야의 책을 고르고 난 후 남편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로 시선을 옮겼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작가의 이름을 찾고, 제목을 확인하고 나서는 유레카를 외치며 남편에게 들어 보였다. 그러면 남편은 몇 권은 봉지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도로 매대에 내려놓았다.

"다 골라도 2달러 밖에 안 하는데 왜 안 사려고?"

"다른 분들도 고를 시간을 줘야지. 우리가 젊고 동작이 빠르다는 이유로 다 쓸어가면 안 되지." 이런 남편의 말을 듣고 그제야 주변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주책없이 빨랐던 내 손과 봉지 가득 찬 욕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침에 본 해바라기와 수국을 닮은 모습의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책을 둘러보고 계셨다. 헝클어진 책을 여유롭게 정리하는 자원봉사자 분들 역시 노인분들이었다.

이런 풍경이 왠지 낯익다.

그날의 그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Nájera (나헤라)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문 앞에 배낭을 털썩 내려놓고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무겁게 눌렸던 어깨 위를 따뜻한 볕이 살포시 감싸주니 온몸이 노곤 노곤해지면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오늘 여기서 묵으려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철쭉 색의 바지에 베이지색 셔츠, 그리고 그 위에 감색 조끼를 입은 멋들어진 패션 센스를 자랑하며 한 노인분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72세의 핀(Finn) 독일인이었다. 역사학자로 일하시다 정년퇴직 후 카미노 협회의 부탁을 받고 이곳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핀의 모습에서 좋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역사를 전공하신 분 답게 이 지역(Nájera)과 산티아고 순례길 전반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술술 풀어내셨다. 그런 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가며 경청하는 남편의 반짝이는 눈빛을 본 핀이 남편에게 물었다.


"너도 나랑 같은 일하며 밥벌이하는구나, 그렇지?"

"네, 저도 역사 전공했어요."

'옳다구나' 싶었던지, 핀이 공동숙소 옆에 조그맣게 딸린 본인의 방에서 적어도 천년은 됨직한 역사책을 들고 나왔다. 라틴어로 쓰인 그 책의 아무 페이지를 펴 보이며 남편에게 읽을 수 있겠냐고 묻는 핀의 모습은 개구쟁이 같았고 그걸 읽어내는 남편의 얼굴에서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맞아 맞아! 그런 뜻이야!" 남편의 그럴싸한 라틴어 해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핀은 신이 났다.

그렇게 그 둘은 한 시간 넘게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세대와 국적은 다를지라도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그들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살이 비췄다.


León (레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레온에서는 유서 깊은 수녀원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정했다. 보통 사람 키의 세배는 됨직한 커다란 대문을 지나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니, 작고 아담한 체구의 중년 여성분이 미소 지으며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오신 아니타(Anita) 자신의 나이를 얘기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 나이 올해 76세. 3명의 자녀와 6명의 손주가 있는 할머니야."

많아야 육십 대 초반이실 거라 짐작했던 내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지 살짝 여쭤봤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었어. 그리고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빠 내 커리어에는 관심을 줄 여유가 한동안 없었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둥지를 떠난 후부터 내 삶을 돌보고 내가 더 할 수 있을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었지. 집 근처 대학교의 평생교육원을 다니며 심리치료 공부를 이어나갔어. 운 좋게 한 자선단체에서 15년 동안 일하다가 또 감사하게도 이곳 수녀원과 인연이 닿아 일 년에 한 번씩 한 달 정도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가는 삶을 지금 살고 있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거창한 것은 없어. 그냥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내 자존감을 잃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


편안하고 널찍한 내 집 침대를 뒤로하고 먼 거리를 날아와 도미토리 옆에 딸린 작은방에서 순례자들의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드는 일이 정녕 쉬운 일은 아닐 테다. 그래도 핀과 아니타의 모습에서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나눔의 정신, 그리고 삶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이 뭉근하게 타고 있기 때문일 거다.



우리 부부가 카미노를 하며 가장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주제가 '은퇴 없는 삶'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한창 자신들의 직업적인 경력의 절정을 향해 불철주야 노력할 때, 마치 조선시대 한량처럼 어슬렁어슬렁 걷는 우리 머릿속에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한 고민이 크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복 받은 삶이 없겠지만, 꼭 그 일이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내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다 싶다.


이왕 인생이라는 마라톤 코스에서 뛰지 않고 걷기로 마음먹은 이상,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길 꿈꾼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내 경험과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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