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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Nov 10. 2019

가시리 가시리 잇고- 사랑, 부부애

산티아고 순례길 열세 번째 이야기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만나는 카미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 뒤편에 있는 작은 광장에 서서 방금 들렀던 슈퍼마켓으로 되돌아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만큼은 우리만의 오롯한 공간을 누리는 사치를 부려도 될 것 같아서 부엌 있는 원룸을 렌트한 우리는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하몽, 치즈, 와인 등에 정신이 팔려 모든 요리의 필수 재료인 소금 사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순례길을 걷는 내내 할 일 없이 쉬고 있던 우리 뇌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어쩌면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신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을 반증하는 것일 테니, 이런 실수쯤은 괜찮았다.


양손에 마트 봉지를 들고 서서, 나는 그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는지 반가운 마음에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안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산티아고라는 공간에 입성한 순례자들은 길에서 잠깐 만났다 헤어진 다른 순례자들과 그렇게 서로를 찾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게도 우연히 한번 더 만났으면 싶은 분들이 생각났다.

나란히 걷는 뒷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한국인 중년 부부가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의 그 부부는 그 길에 익숙한 듯 보였다. 길 옆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봉우리를 향해 같이 눈을 돌렸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좁은 길을 걷고 있던 때라 우리가 너무 바짝 따라붙어서 걸으면 그분들께 빨리 걸으라 재촉하는 것 같아 일부러 그분들과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큰 길이 나오고 나서 그분들 가까이에서 걸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걸음이 빠른 우리는 이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너무나 짧은 만남이 아쉬웠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 지겠지' 위로하며 지나왔다.


그 후로 두 번 더 그분들을 카미노 길에서 잠깐 만났었다. 노천카페에서 만났을 때, 부인이 내게 건넨 잘 말린 무화과의 맛은 눈물 나게 달콤했었다. 포장 단위가 너무 커서 사지 못해 먹지 못하고 있던 무화과였다. 도토리를 만난 다람쥐 마냥 양 볼에 빵빵하게 무화과를 집어넣는 내 모습을 웃는 눈으로 보시고는 가지고 있던 무화과를 내게 다 주고 가셨던 일.

같은 마을에서 짐을 풀었던 어느 날. 그분들은 취사가 가능한 알베르게에서 밥을 해서 드셨기에 함께 나가서 식사할 기회를 놓친 것을 서로가 안타까워했던 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분들과의 짧았지만 오랜 여운이 남았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던 그때. 누군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껏 확장되어있던 동공을 재빨리 축소시켰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방금 막 생각하고 있던 어떤 일이 짜잔 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그랬다. 내가 그분들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던 그때, 그분들이 내게로 왔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해산물 짬뽕의 매콤한 냄새가 우리 방 안에 퍼졌다. 우리를 위해 부인 E님이 산티아고 전통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해산물과 한국에서 가져와 순례길 내내 함께 했다는 고추장, 고춧가루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조합이 밥상 위에 올려졌다.

뜨끈하고 칼칼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니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맛에 감동해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는 우리 커플의 모습과는 달리 어색하게 긴장된 표정의

그 부부는 아직 음식을 드시지 않고 있었다.

부인 E님이 남편 H님께 무언의 눈빛을 보내니 H님이 깜빡할 뻔했다는 듯 가방에서 주사기꺼내시며 조심스럽게 털어놓으신 이야기.


"내 췌장 안에 고약한 놈이 자라고 있어. 그놈을 발견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네. 그때 내 나이 58세였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사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싸워봐야겠다 싶어서 악착같이 항암치료를 받았어. 내가 포기해버리면 그런 내 모습과 같이 무너져 내리고 말 것 같은 마누라 인생을 생각하니 어떻게든 버텨야겠더라고."


"아프기 전까지 나는 참 까칠한 사람이었어. 의류 사업을 했었는데 완벽주의자에 매사 호불호가 확실했던 나라는 사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선 채로 일상을 살았지. 입맛이 까다로워서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잘 먹지도 않았어.

그런 내 옆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모든 행동에 조심하며 나에게 많은 것을 맞춰주며 살았을 아내의 안쓰러운 모습을 알아차린 것도 겨우 아프고 나서의 일이야. 그전까지는 당연한 것인 줄 알았거든. 몸은 늙었는데 생각은 어른스럽지 못한 이기적인 어른으로 나는 살아왔더라고."


E님은 늘 H님 함께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꿔왔다고 했다. 성당 친구들이 수녀님들과 그룹으로 순례길을 갔을 때도 E님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H님이 은퇴한 후 함께 걷기 위해.

그래서 H님은 더더욱 살아야겠더란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기다려준 부인과 함께 순례길로 갈 수 있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며 신께 빌고 또 빌었다고 말씀하시는 H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매운 짬뽕 맛을 핑계 삼은 우리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맵다며...



이듬해 봄. 다시 떠나신다는 카미노를 며칠 앞둔 어느 따뜻했던 날. 그분들이 사시는 일산 댁으로 초대를 받아 갔었다.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H님은 털모자를 쓰고 계셨다. 지난가을 때 보다 더 야위고 움츠러든 어깨에서 항암치료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부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집 내부를 소개해주는 E님을 따라 움직이던 내 시선이 어느 한 물체에 정지된 듯 꽂혔다.

"어... 저 사진은..."

"기억하는구나. 맞아, 우리가 또 한 번 운명처럼  톨레도(Toledo) 역에서 마주쳤을 때 그 당시 남편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찍은 거야."

순례길을 마친 후 들른 톨레도에서 그분들을 한번 더 만났을 때, H님은 영화 '킹스맨'의 주인공 '콜린 퍼스'보다 멋진 신사의 복장을 하고 계셨다.

상하위와 절묘하게 매칭이 된 스카프와 중절모.

반짝이는 액자 속에 담긴 H님의 온화한 미소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이리 좀 와봐. 자랑할 것이 있어."

거실 소파에 앉아 맛은 달고 끝 맛은 쓰디쓴 보이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보이는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H님이 우리를 현관 쪽으로 부르셨다.

아들, 딸 내외가 새로 사주었다는 바퀴 달린 배낭과 아주 편해 보이는 트레킹화 두 켤레가 바깥쪽을 향한 채 대기 중이었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듯.


예정된 날짜에 그분들은 카미노 길로 향하셨다.

제발 무사히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루어내시길 바랐던 우리의 기도는 이내 차가운 슬픔으로 되돌아왔다. 순례길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별의 한을 잔뜩 담고, 

그렇게 새 신발과 가방은 주인 없이 돌아왔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바리고 가시리 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 잇고

잡사와 두어리마

선하면 아니올셰라

설온님 보내암노니

가시난닷도셔 오쇼서


-고려가요 <가시리> 중에서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 뻔한 길을 떠난 H님을 무모하다고, 그런 남편을 말리지 않은 E님을 미련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헨리(O.Henry)의 단편 <마지막 잎새> 주인공 존시가 되어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나는 죽을 거라며 절망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대신 때가 되어 떨어지는 그냥 하나의 잎사귀가 되길 H님은 소망했을 테다. 그런 H님 곁을 E님은 조용히 지키셨겠지. 늘 그러셨듯.


님은 가고 없어도, 그 길을 붉게 물들인

두 분의 사랑은 항상 그곳에 있다.

카미노와 사랑은 영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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