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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Dec 13. 2019

바르셀로나 보른 거리의 24시

바르셀로나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24:00, 보른 거리(passage del born)의 금요일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한동안 밤에 눈 쌓이는 소리만 들리던 곳에서 지내다가 와서 인지, 

밤 12시가 다되어가는 이 시각에 눈은 감았으나 귀는 열려서 닫힌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소리를 받아들인다.

술집 오디오에서 퍼져 나오는 음악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큼 다양하다.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다된  Bon Jovi의 It's my life를 시작으로 슬슬 달궈진 분위기는 라틴가요의 아들 Enrique Iglesias의 Bailando에 다다라서는 떼창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과 이곳 현지 젊은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마음껏 질러대는 소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채 하늘로 뻗어 나간다. 이들에게 노래방이나 댄스 클럽은  따로 필요 없어 보인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춘다. 형식은 중요치 않다. 그저 그 순간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즐기면 그만이다.


03:30

새벽 3시에 술집들이 문을 닫지만, 술집 앞 거리에는 흥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한 칸 남은 채로 깜빡이는 몸속 배터리를  써버리고야 말겠다는 심산인지 왁자지껄하다.

술집의 화려한 조명도 신나는 음악도 꺼지고 없지만, 불나방처럼 가로등 불빛 아래 모여든 취객들의 목소리가 나방이 퍼덕이다 일으킨 먼지처럼 산만하게 퍼진다.


보행자 전용 도로(배달용 차량은 진입 가능한)에 느닷없이 등장한 청소 차량에서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도로 위에 묻은 간밤의 열기와 젊음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다가오는 아침에 깨끗한 낯으로 새로운 여행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청소차는 이른 새벽부터 열심이다.

물세례를 싫어하는 건 나방이나 사람 매한가지. 물청소차가 다가오면 취객들은 도망가고, 그렇게 보른 거리는 그제야 늦은 잠을 청한다.


09:00

질 좋은 버터를 온몸에 두른 크로와상과 겉은 거치나 속은 야들야들 부드러운 바게트 굽는 냄새가 콧속을 간지럽힌다.

따뜻한 이불을 뒤로한 채 일어나 커튼을 열고 발코니 아래 거리를 내려다본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답게 보른 거리의 아침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한국 관광객들이, 아무도 일찍 일어나지 않아서 진정으로 조용한 바르셀로나의 아침을, 열어준다. 현지인들보다 더 예쁘고 멋지게 차려입은 그들의 발길은 한 곳으로 향한다.

H베이커리. 마스카포네 크로와상을 한 손에 들고서 약간은 인위적이게 웃는 얼굴로 한컷 찍고, 한입 크게 왕 베어 물고선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림과 빵 맛에 반해 저절로 흐르는 미소를 풍기며 거리를 지나간다.


어느 고요한 날의 보른거리


11:00

'보~~(botella)

: 병(bottle)을 뜻하는 스페인어'

막대기로 쇠붙이를 두들겨 장단을 맞추며 골목길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묵직한 아저씨의 목소리. 보떼야~

손수레에 주황색 LPG통을 가득 실은 상인은 통을 막대기로 두드려가며 가스를 살 고객을 부른다. 

마치 낡은 엿장수 가위를 맞부딪히며 이태원의 해방촌에서 '칼 갈아요~'를 외치던 칼 가는 일을 업으로 삼은 아저씨처럼. 

집 안에서 듣고 있자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밖에 나가서 실체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는 해방촌에 사는 외국 친구의 말처럼, 나도 처음 '보떼야'를  들었을 때 그랬었다. 너무 궁금해서 소리를 쫓아가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방인들에겐 신기한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그곳 고유의 소리. 세월이 지나도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사람 사는 소리.


15:00

거리 가득 감미로운 악기 소리가 퍼진다.

'And now, the end is near///I did it my way'

앞부분 가사는 몰라도 후렴부 가사는 모두에게 익숙할 'My Way'의 멜로디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들려온다.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겠거니 지레짐작하며 거실에 앉아 열린 발코니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를 1년이 넘게 즐겼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시간에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풍경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의 지식으로는 검색조차 해 볼 수 없어 도무지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악기를 연주하는 젊은 남자. 톱날 없는 긴 톱의 모양을 한 투박해 보이는 악기에서 어떻게 현악기보다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실제로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 그래서 흥미로운 세상이다.


이 악기 이름은 무엇일까요?


17:00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이 들린다.

걸어서 하는 투어가 보른 거리에서 끝이 났음을 알리는 이 소리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늘 같은 레퍼토리일지라도 열정 섞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썼을 가이드에게 보내는 수고의 인사다.

바르셀로나를 찾는 사람들의 다양한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투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한낮부터 시작된 박수 소리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아낸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가 긴 여운을 남기며 거리에 머물다 간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리는 시간은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 슬슬 유흥 본능에 시동을 거는 때다.

보통 저녁 8~9시쯤 시작되는 이곳의 밤 문화는 낮보다 뜨겁고 시끌벅적하다.


오늘 밤에는 어제보다 조금 덜 시끄럽기를 바라며 이른 잠자리에 든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고 나면 한밤의 소음도 그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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