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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Dec 17. 2019

크림치즈빵과 삼겹살

여행과 일상의 간극


'너 다음번에 이사할 때는 꼭 어디로 갈 건지 미리 알려줘. 나 너 이사 가는 곳으로 따라갈 거야!'

어느 날 절친 J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한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연남동에 몇 년 살았을 때에도, 그리고 그 후에 경리단으로 이사를 갔을 때도

내가 이사를 감행했던 시점에는 주변에 이렇다 할 상점들이 없어 다소 심심해 보이던 곳들이었다. 나는 그저 그 당시에는 저렴했던 월세 가격과 작게 난 골목길에 매료되어 살 곳을 정했을 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이사를 하고 난 후 1~2년 만에 그곳들은 소위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디저트를 파는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더니 그곳들이 금세 '서울에서 꼭 가봐야 할 디저트 가게'의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주말마다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작년에 우리 부부는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왔다. 대학원 졸업한 지 십 수년도 더 지난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박사과정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며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가 더 하고 싶은 것이니 내 기꺼이 함께해주마'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백수가 되어 해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고, 벌이가 없으니 교통비라도 아끼자는 생각으로 살집은 무조건 캠퍼스에서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구하고자 했다. 도시 전체가 관광지나 다름없는 이곳의 아파트 렌트비는 어마 무시했고 그나마도 임대 가능한 집을 찾아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국인 신분인 우리에겐 애초부터 별 선택권이 없었다.

일주일간 온 시내를 다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살 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다. 동네 분위기가 어떤지 살필 형편이 못되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 짐 풀 곳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사를 하고 하루 이틀이 지난 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또 유명한 디저트 가게들이 밀집한 곳에 살게 되었음을. 단지 이전에 내가 살았던 곳과 차이가 있다면,  이곳은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유명했다는 것인데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르셀로나 여행책 한 권 읽은 적이 없다. 내가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동네 골목길


'apples and oranges'

영어 표현 중에 'apples and oranges'라는 것이 있다. 어떤 두 가지 물질이나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서 비교하기 부적합하지만 굳이 비교해야 하는 경우에 주로 쓰는 표현인데, 이 글의 제목과 딱 어울리는 듯하다.


H베이커리의 효자상품인 크림치즈 크로와상(mascarpone)과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매 가능한 생삼겹(pancetta).

 둘공통점이라면 이탈리아어로 이름 지어진 음식이라는 것, 전체 영양소 중 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에 가깝다는 것, 그렇기에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자꾸 먹게 되면서 결국엔 후회의 쓰나미를 몰고 온다는  등 약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쉽게 알게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들의 또 다른 공통점인 동시에 커다란 생각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가격이다.

마스카포네 크로와상 하나와 600g짜리 판체타 한팩의 가격은 2.5유로로 같다.

전자가 고급스러운 디저트의 전형이라 한다면, 후자는 생활 밀착형 서민 먹거리의 상징이 될 테다.

 

사실 나는 디저트를 즐겨먹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광객들의 지갑을 쉬 열게 만드는 그 크로와상의 인기가 과하며, 현지 물가 대비 가격도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었다.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이리도 듬뿍 받는지 한번 먹어나 보자 싶어 처음으로 마스카포네 크로와상을 하나 사 먹었을 때, 혀 끝에 닿자마자 스르르 녹아 바로 대뇌로 전달되던 그 달콤한 에너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있다.

2.5유로가 아깝지 않은 맛이었고, 여행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일부러 사 먹으러 올 가치가 충분하다 느꼈다.

깊은 맛도 맛이지만, 바르셀로나에 와서 그 빵을 먹어보았다는 경험의 가치는 값으로 따지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디저트보다는 메인 요리에 올인한다.

판체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산다.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삼겹살 가격은 정말 착하고 고맙다.

마스카포네는 몇 달에 한번 살까 말까 한다. 아주 가끔 이곳에 터를 잡은 교포분들 댁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선물용으로 산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에 정착하신 지 30년이 넘는 한 가정에 방문했을 때 예순이 넘은 그 댁 어머님은 마스카포네를 처음 먹어보신다고 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본인 먹겠다고 일부러 사러 가게는 안되더란다. 그리고 그 돈이면 삼겹살이 한 근 이라며.

그래도 빵은 참 달고 맛있다며 환히 웃으시는 그분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굴곡 많았을 이민생활의 온갖 시름이 크로와상의 켜켜이 쌓인 층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디저트가 좋아 친구 따라오겠다던 절친 J는 한동네에 살겠다는 다짐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우리 집을 방문한 친구들 중 일등이었다. 나와 달리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디저트를 사랑하는 그녀는 먼 길 날아와서 이 동네 디저트 맛집들의  시그니쳐 메뉴를 모두 사주고 돌아갔다. 일상에 찌들었던 내게 여행자의 쿨하고 달콤한 향내를 잔뜩 뿌려주고 그녀는 그녀의 일상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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