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1. ‘볼잭’에 대한 얘기 좀 해주세요
“볼잭에 대한 얘기 좀 해주세요. 정말 그렇게 뛰어난 작가예요?” 소설 『롤리타』의 한 대목인데 ‘볼잭’은 ‘발자크’의 영어식 표현이라고 한다. 최근 나 역시 『롤리타』 속 롤리타와 같은 궁금증을 품고 있던 터라 반가움에 표시해 두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고리오 영감』을 읽는 내내 나 또한 궁금했다. 발자크는 정말 그렇게 뛰어난 작가일까? 발자크의 무엇이 그를 발자크로 만들었을까. 『고리오 영감』은 우리에게 어떤 발자크를 소개할까.
발자크가 프랑스 현대소설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한다. 간단하게만 살펴보면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1834)보다 조금 더 앞서 『적과 흑』(1830)을 쓴 스탕달과 더불어 사실주의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읽기에는 다소 통속적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의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당시 사회를 날카롭게 드러냈다고 평가받는다. 가령, 그들은 로맨스라는, 오늘 우리에게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는데, 여남 간의 애정과 결혼이 당시 역동적으로 변하는 프랑스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매개로 기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모양이 바뀌고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로맨스는 여전히 현대를 반영한다. 바꿔 말하면, 발자크는 현대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현대소설의 시작은 발자크에게서 시작된 사실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발자크를 특징짓는 또 다른 업적은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기획이다. 발자크는 당시 사회를 자신의 작품 안에 전부 담아내겠다는 허황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믿기 힘든 작업량을 바탕으로 3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약 90여 편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하지만 작품 생산량이 그를 발자크로 만든 건 아니다. 발자크가 ‘인간희극’이라는 기획안에서 발표한 소설 모두는 각각의 작품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작품들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90여 편의 소설은, 당시 파리 사회를 담아낸 하나의 작품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희극’이라는 기획의 핵심에는 ‘인물의 재등장’ 기법이 자리한다. 쉽게 말하면, 한 소설에서 이미 등장한 인물을, 다른 작품에도 다시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같은 이름을 빌려다 쓰거나, 같은 인물을 까메오로 잠시 등장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해당 인물이 다른 작품에서 자리하던 삶의 맥락을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두 편 이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만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발자크의 작품들은 이렇듯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인간희극’을 이루는 많은 작품 중에서도(89~94편) 크게 세 작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고리오 영감』이다.
2. 아버지 고리오
『고리오 영감』의 프랑스어 원제는 ‘아버지 고리오’(Le Pere Goriot)이다. 소설은 아버지 고리오가 두 딸을 향해 쏟아붓는 부성애를 중심에 둔다. 작품의 속내가 어떻든 두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혹은 지나칠 정도의 애착이 표면에 드러난 주제다.
『고리오 영감』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고급 하숙집>은 고리오 영감이 머무는 하숙집과 그 숙소에 거주하는 다양한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고리오 영감이 사는 ‘고급 하숙집’은 파리에서도 낮은 지역에 위치한다. 얼마 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가 늘 지하나 하수구 등 낮은 공간을 통해 계급 문제를 다루듯이 ‘고급 하숙집’이 자리한 낮은 지역 역시 파리 하층민의 삶을 드러낸다. 1장과 달리 2장 <사교계 입문>은 소설의 실제 주인공이면서 작중 화자인 라스티냐크가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사교계의 문을 두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장이 지시하는 배경은 모든 면에서 1장과 대조를 이룬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저택과 계급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마차 등에서 알 수 있듯, 2장과 1장은 서로 마주 보며 양 끝에 자리한다. 3장과 4장 역시 마찬가지다. 3장 <불사조>는 파리라는 세계에 끝내 저항하는 보트랭이라는 인물을 다룬 반면, 4장 <아버지의 죽음>은 당시 사회를 상징하는 ‘가족’에게 복종한 아버지 고리오의 죽음을 그린다.
고리오는 제면업으로 성공한 부르주아다. 한때 하숙집에서 가장 좋은 2층 전부를 빌려 쓸 만큼 넉넉한 자산가였던 고리오는, 이제는 가장 허름한 4층 방에 머무는 초라한 노인일 뿐이다. 재산 전부를 두 딸의 결혼 지참금으로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두 딸은 결혼 이후에도 사교계에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막대한 지참금뿐만 아니라, 남은 자산을 하나씩 처분해서 딸들에게 쏟아붓던 고리오는 마지막 남은 은그릇 하나마저도 두 딸에게 헌납한다. 귀족 세계에 편입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두 딸에게 고리오는 자신의 노년 전부를 바치지만, 정작 두 딸은 아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결국, 아버지의 골수까지도 저당 잡으려는 듯 다시 찾아와 신세를 늘어놓는 두 딸에게 충격받은 고리오는 쓰러져 눕게 되고 며칠 후 숨을 거둔다.
사실 이 같은 서사는 식상하다. 요즘엔 질 나쁜 아침 드라마에서나 접할 수 있을 법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흔한 소재를 통해 발자크는 무슨 말을 하고자 했을까. 답답하다 못해 어리석고 징그럽다 싶을 만큼 두 딸을 애착하는 아버지의 순전한 사랑을 조명하려고 했을까. 고리오의 희생만을 단물처럼 뽑아먹고 그를 내팽개친 두 딸의 사악함을 드러내려던 건 아닐까. 1830년대에는 이런 서사 자체가 참신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고리오 영감』을 읽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거칠게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뒤로하고, 귀족정치로 회귀하던 시기다.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고 외쳤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프랑스는 과거로 발걸음을 돌렸다. 야망이 무력해진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수직적인 신분 변화를 비롯해 다양한 역동성을 허락했던 프랑스는 다시금 닫힌 사회로 향했다. 엿보였던 희망이 눈앞에서 사그라진 것이다.
『고리오 영감』 속 고리오의 삶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신흥 부자 즉 부르주아였던 고리오는 이미 몰락한 채로 소설에 등장한다. 남은 희망은 두 딸이다. 그렇다면 결혼으로 이미 상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두 딸에게 여전히 남은 재산을 쏟아붓는 까닭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니다. 두 딸이 고리오가 도달하고자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리오는 상류사회로 진입한 두 딸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를 바란다. 고리오는 두 딸을 통해 높은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라지만, 거울은 자신을 비춰주지 않는다. 그는 두 딸의 반응과 애정을 갈구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고리오를 외면한다. 고리오는 자신이 키운 딸과 벌어들인 돈, 즉 자신의 세계로부터 소외된다. 고리오는 자신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고리오는 “하지만 내가 안 것은, 나 자신이 잉여 인간이라는 사실이었어”(370)라고 자조하며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고리오’는 서로가 서로를 잉여화 하는 세계를 지시한다. 그들은 마주 보지 않는다. 세계가 응답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리오는 프랑스가 품었던 희망이며 환상이다. 즉 고리오의 죽음은 희망적인 과거의 몰락을 뜻하는 동시에 잉여화 될 인간에 관한 예언이다.
3. 파리와 나의 대결이다
아버지, 더구나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남성 작가의 고전 작품일수록 ‘아버지를 극복하려는 아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고리오 영감』은 딸들을 말한다는 점에서 의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고리오 영감』에서 두 딸은 아버지를 극복하기는커녕 몰락한 아버지를 묘사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에서 아들의 역할은 ‘라스티냐크’라는 젊은 청년이 맡는다.
『고리오 영감』의 실질적 주인공인 ‘으젠 드 라스티냐크’는 출세를 위해 도시로 상경한 시골 청년이다. 법을 공부하기 위해 온 파리에서 고리오가 묵던 하숙집에 함께 머물게 된 라스티냐크는 성공을 꿈꾸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고리오 영감은』 순수한 시골 청년 라스티냐크가 상류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과정을 다룬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성장해 갈까. 라스티냐크의 성장을 소설은 어떻게 다룰까.
라스티냐크는 소설 속 화자(話者)다. 소설에서 말하는 자는 동시에 관찰한다.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지켜보는 시선이다. 시선은 관찰과 관음 즉 욕망 사이를 오간다. 라스티냐크는 세계의 관찰자인 동시에 세계를 욕망하는 인물이다. “파리에서 자기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잠을 안 자고 지켜보아야 한다.”(51) 라고 독백하던 그는 결국 소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야망과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파리라는 거대한 세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하는 고리오와 투쟁을 의미하는 무정부주의적 인물인 보트랭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라스티냐크는, 고리오의 죽음 즉 파리에 부딪혀 몰락한 삶을 목격한 뒤, 파리라는 닫혀버린 세계와 맞붙기로 다짐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
으젠 드 라스티냐크 앞에 붙은 ‘드’(de)는 그가 귀족임을 보여준다. 라스티냐크는 나폴레옹처럼 하급 귀족 출신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 고리오가 몰락한 나폴레옹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라스티냐크는 다시 야망을 품고 닫힌 파리를 뚫으려는 또 다른 나폴레옹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고리오 영감』 이후 라스티냐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는 이 사회를 거창하게 나타내는 세 가지 표현을 보았다. <복종>과 <투쟁>과 <반항>, 즉 <가정>과 <세상>과 <보트랭>이다. 그런데 그는 결심할 수 없었다. <복종>은 귀찮고, <반항>은 불가능하며, <투쟁>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349)
4. 필요하다면 부수자
1834년 작품인 『고리오 영감』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찾기는 쉽지 않다. 현대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이 제시하는 현대성은 이미 우리에게 깊숙이 스민지 오래여서, 참신함에 반응하는 감각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더구나 프랑스 파리라는 시공간적인 배경을 알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고리오 영감』은 따분하기 그지없는 소설처럼 보이기 쉽다. 아버지의 죽음도, 성공 앞에서 갈등하는 청년 주인공도, 여성을 대상화하는 작법도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서평을 출발할 때 나는, ‘아, 이게 발자크구나’라고 감탄을 내뱉으며 이 글을 맺기를 바랬다. 글을 쓰면서 소설을 깊이 알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몇날 며칠을 『고리오 영감』을 붙들고 씨름한 지금도 나는 발자크가 왜 위대한지 궁금하다. 내가 잘못 읽은 탓이라고 믿고 싶다. 누군가 나타나서 내게 발자크가 왜 대단한지를 전해줬으면 싶기도 하다. 혹은 '까불지 말라'며 내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그럼에도 그 이상이 없다면, 시작에서 인용한 『롤리타』를 쓴 나보코프의 말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언젠가 누군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서 발자크와 고리키와 토마스 만을 힘차게 때려 부수리라.”
서평33. 『고리오 영감』/오노레 드 발자크/민음사/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