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갖다 버렸습니다
나의 새로운 일터는 나름대로 규모 있는 영어학원이었다.
서류합격 후 원장과의 면접이 진행됐는데
원장님은 여러 모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14년 전 처음 학원을 열었을 때 부터 시작해
2시간을 얘기했는데, 다양한 상황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물론
본인 자식들 얘기까지 포함된 이야기 까지 안 한 이야기가 없던 것 같다.
사실 엄청난 기대를 갖고 들어간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해왔던 일이며
새로운 도시에서 구한 일.
딱 1년만 버텨서 배우고 그 다음을 생각해보자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스페인에서 나와 맞지 않던 집주인이 오버랩 되는 데도 애써 무시했다.
그저 기분탓일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입사결정을 꽤나 후회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많은 학원이 그러하듯 이 학원도 사이즈를 줄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입사하기도 전에
이사부터 하자고 불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일 시작도 안한 사람한테 이사까지 도우라고 부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불렀으니 가서 도우려고 했으나, 뭘 알아야 분류를 하고 옮기지 내가 할 일을 찾기 힘들었다.
이리 저리 눈치를 보고 있자니 한 선생님이 나를 불러 차 한잔 사주시겠다고 했다.
(대놓고 눈치봐서 불쌍하다고 하시며 사주셨다)
그리고 나는 말로만 듣던
전임자의
'도망쳐.'를 듣게된다.
그 선생님도 이 학원을 그만둘 예정이라고 했다.
계약서 상 석달동안은 그만둘 수 없지만,
바로 다음날 부터 안나온 선생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엔 새로운 도시에 들어왔고
나 자신도 큰 걸 바라는 것도 없으니,
1년은 어떻게든 버틸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난 후로 정확히 3개월 만에 퇴사하게 된다.
학원은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사를 시킨 것 만으로도 부족한지
다시금 나를 불렀다.
코로나가 심각해 짐에 따라 휴원을 결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일 시작도 전에
엄청난 양의 책을 나르며 이사를 하고
앞을 맡게 될 6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의 보호자님께
휴원 전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 했다.
내가 콜센터에 취직한 건지 학원에 취직한 건지 모르겠단 한탄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아직은 1년은 버텨보자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꾸역꾸역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이전에 한 번 말했듯이
나는 내 생각보다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첫 시작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일은
불안을 불러왔지만,
새로운 시작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라 애써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학원이 안맞았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실제로도 학원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면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맞았다.
나는 이제까지 일을 못하는 사람 취급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나도 안맞는 일이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나고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한참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집에서 눈물께나 쏟았다.
낯선 일.
딱히 물어볼 사람도 없는 환경.
이미 작년 겨울부터 망하기 시작했다는 반을 다시 살리기엔
내 자신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잘 운영되고 있는 나머지 반은 내 덕은 아니라고 여겼다.
심지어 나는 한 아이의 레벨업을 반대했는데
분명히 잘 했다며,
다른 아이들과 맞춰서 올려야 된다며 레벨업을 하더니
아이가 너무 어려워 따라오기 버거워 하고 수업에 흥미를 잃자
내가 관리를 못해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나가고 들어오는 게 학원의 당연한 섭리라고 생각하는 나에 비해
한명이라도 더 관리해서 나가는 학생이 없게 하라는 학원은
그 입장 차이가 너무 컸다.
심지어 작년엔 나간 애들 사유를 전체 회의 때 모두 발표했어야 했다고 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인가 싶었다.
이래서 선생님들이 3개월마다 바뀌는 구나 싶기도 했다.
에지간한 일은 중도에 포기하는 일 없는 나도
딱 한 번 하루만에 그만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일이 있었는데
일이 고되기도 했지만,
텃세가 너무 심해 정말이지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삐그덕거림이,
다시금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부장 선생님께 불려가(분명 원장이 쪼았던 게 분명하다)
내가 기록한 상담일지에
빨간색으로 줄을 그어가며
왜 이렇게 말했냐고
취조아닌 취조를 받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드믈게
진심으로.
누군가를 향해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장 차 바퀴가 구멍이라도 났으면 하고 바랐지만,
나는 아주 조용하고
웃는 낯으로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건 내 인생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그만뒀다.
물론 나도 너무나 힘들었지만,
매일 휘청거릴 정도로 진이 빠져서 퇴근하는 나 때문에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한 우리집 고양이가
스트레스로 인해 배를 핥고 또 핥아
맨 살이 피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일도 속상하지만 내가 잘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심지어 고양이마저 이 지경이 된 걸 보고
퇴사의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도 한참 남은 기간동안 지긋지긋함에
매일 나가는 길에
D-Day를 문에 붙여놓고
한개씩 숫자를 지워나갔다.
'당장에라도 그만나갈까'라는 말을 스무 번 쯤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그 학원과의 악연을 끝낼 수 있었다.
(분명 그들도 내가 나가서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