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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pr 09. 2020

복사꽃의 안부

복사꽃의 안부

그녀에게


그날 아침은 참새들이 쪼잘거리느라 길목이 소란스러웠어요. 꽃진 벚나무 아래서 말라가는 붉은 꽃자루들을 연신 쪼아대며 포롱포롱 모였다 흩어지다 한꺼번에 덤불사이로 숨어버렸어요. 누가 이리로 오고 있는 줄 알았어요. 지팡이 소리 쿠웅 쿠웅 울리는 걸 보니 당신인가 했어요. 나를 보자 허리를 쭈욱 펴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기셨지요.

얼마만인가요? 사랑스러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던 날이. 내가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벌써 일주일이 넘었네요. 당신만큼 나를 오랫동안 취해서 바라보는 분은 없어요. 당신에게도 봄날이 찾아온 듯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걸 보았어요. 할 수만 있다만 날마다 당신에게 봄날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어요.

그렇게 다녀간 이후로 저는 붉게 봄하늘을 달구고 있는데, 왜 그동안 통 보이지 않았는지요.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몰라요.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아시지요. 혹시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니면 당신에게 변고가 생겼으면 어쩌나 해서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꽃샘바람이 어찌나 변덕스럽고 못되게 굴었는지요. 이파리가 파들파들 떨리도록 견디느라 기진맥진 했지요. 아마 당신도 나처럼 꽃몸살을 하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여섯 해 전 당신과의 만남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개복숭아라고 농장에서 버림받은 저를 여덟 친구들과 함께 여기, 파란 하늘이 우물처럼 빠끔히 내다뵈는 공원으로 데려왔어요. 당신은 산 아래 약수터에서 남편과 함께 물을 배낭에 져 나를 때는 기운이 펄펄 했지요. 그렇게 날마다 정성을 다해 보살핀 덕택에 홀로서기를 하게 되었지요.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한 세 친구들의 빈 자리도 저희들의 넓어진 품으로 허전한 구석을 채우고 있어요. 어엿한 숙녀가 되어 서로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나란히 서서 이곳 식구들과 함께 사랑을 받고 있어요. 밤과 낮으로 바람과 비가 다녀가고 토끼들이 발밑을 간질이는 이곳에서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진홍빛으로 타는 봄날이지요. 

이제 당신을 뵈니 다시 온몸에 생기가 돌아요. 그러나 당신은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시네요. ‘벌써 꽃이 지고 있네.’ 그 말씀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나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당신의 얼굴도 무척 수척해지셨어요. 부들거리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저를 찾아와 주셨군요. 이제라도 당신을 뵈니까 마음이 놓여요. 마지막 봄날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으니까요. 이제 초록의 시간으로 돌아가렵니다. 다시 오는 봄 당신과 뜨겁게 눈 맞춤하기 바래요.

꽃에게 

나의 겨울은 언제나 웅크린 채 집안으로만 파고들었어. 너는 빈 가지로 애처롭게 떨고 있는데 나는 방안에서 온도를 높이며 속옷 바람이었지. 어쩌다 외출을 할 때는 털옷으로 무장하고 나서지만 찬바람에 쫓기듯 얼른 집으로 돌아오기 바빴지. 겨울잠을 자듯 보내다보니 바깥보다 입이 궁금해서 주설나게 냉장고문을 열었다 닫았더니 솜이불처럼 몸이 부하게 일어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굴러다니는 것 같지 않았을까 싶어.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넘칠 즈음에야 집 앞 공원을 찾았지 뭐야. 숨이 차서 몇 번이나 쉬엄쉬엄 올라가보니 운동기구들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열심히 단련하고 있었어. 벚꽃 지고 연두 빛들이 초록으로 잎을 키우는 사이, 한 무더기 진홍빛 꽃들이 사태가 지는 걸 보았어. 너의 이름이 홍매화라는 걸 일러 준 분이 있었어. 

 머리 숱이 유난히 성근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의지해서 줄곧 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가다가 내 곁에 가쁜 숨을 길게 몰아쉬었어. 

“벌써 꽃이 지고 있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지는 것처럼 한숨이 묻어나왔어. 너와 할머니의 사랑을 보았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걸었어.

“오랜만에 나오셨나 봐요?”

독감에 걸려 한참 앓아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나와 너를 보러 왔다는 거야. 이 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리고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서둘러 너를 만나러 온 거야. 너를 볼 때마다 복사꽃 핀 고향의 봄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양지바른 언덕으로 앞뒷집 친구들과 냉이며 쑥을 캐 와서 저녁상에 쑥국과 냉이무침을 올리면 봄 내음이 방안 가득했을 테지. 두레상에 둘러앉았던 그리운 이들을 생각하며 꽃웃음을 지었을 거야. 

‘할아버지는요?’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어. 여섯 해 전에 남편과 농장을 찾았을 때라고 했어. 무슨 나무냐고 묻는 말에 농장 주인은 밭 한 귀퉁이에서 초라하게 서 있는 너희들을 가리키며 개복숭아나무라고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고향의 밭두렁에 활짝 핀 복사꽃이 떠올라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 비록 키는 허리춤에 오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벌써 복사꽃이 무성하게 피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들이 날마다 운동하는 공원에 심어놓고 보자는 말에 남편도 좋다고 했데. 오래 전 배낭을 지고와 물을 주던 그분이지 뭐야.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라 유달리 정이 가는데 토끼들이 새순이 나오면 갉아먹지를 않나 어떤 이는 풋 열매를 따서 배낭에 지고 간다며 못내 아쉬워했어. 내가 토끼들 보는 재미로 이곳에 온다고 했더니 ‘다 같이 살아야지’ 하며 슬그머니 양보를 하는 거야. 너도 고것들의 재롱을 보는 게 즐거울 거야. 그리고 열매가 떨어져 비록 싹을 틔우지 못해도 약으로 쓴다니 보람일 수도 있지 않겠어.

 벌써 너희들은 피멍처럼 말라 언젠가 흔적마저 지워지겠지만 내가 이곳에 오는 즐거움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어. 토끼들과 함께 너의 안부를 물으며 자주 쳐다보게 될 거야. 할머니에게 봄날을 선물했듯이 해마다 내게도 선물처럼 안겨줄 진홍빛 봄날을 기다리며 오르내릴 것 같아. 어쩌면 이곳을 오르내리는 이들 가운데도 서로의 안부를 물을지도 모르지. 오래 오래 봄날을 이어 갔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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