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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정률 Jun 20. 2024

근육이 지문 같은 거라면서요?

길고 길지만 나에게는 필요한 운동 다짐문


차라리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의 숨은 기술 중 하나는 '피하기'이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인데, 몇 번의 대통령 선거의 개표 방송이 그랬고 제왕절개 전에 수술 후기도 그랬다. 때로 못나게도 봐야만 했던 뉴스를, 누군가의 목소리 앞에서도 그런 적이 있다. 괴기한 소리를 내는 작은 인간-내 유전자가 많이 담겨 있는-이 놀이터 바닥을 드러누울 때도 잠깐 눈을 감는다.


거울과 체중계는 출산 이후 가장 많이 피해온 것들이다. 기억의 형태와 다를 것이 분명한 몸의 외곽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동선을 최소화시킨다 - 전신 거울은 신발장에 달려있을 뿐- 다리가 점점 꼬아지지 않고 고무줄의 탄성마저 날 감당하지 못했지만, 체중계에 오르지 못했다. 높이 치솟는 승모근과 경계 없이 부풀어 오르는 복부의 느글거림, 꿀리지 않는 무릎과 기지개조차 뻐근한 몸이 나를 자꾸 불편하게 했음에도.


그 사이 나만큼 옷장의 두께는 줄어들지 않았다. 언젠가 살이 빠지면 입을 꺼라며, 내 과거의 최애 옷들과 예쁘니 일단 소장해 본 희망의 옷들이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한 채로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점점 줄어들고, 살을 빼고 사야 하니 옷을 또 안 사서, 서랍 속에는 죄다 목이 해파리처럼 너풀거리는 티셔츠와 임산부 시절 사두었던 최강 스판 바지들만 남아버렸다.


그러나, 피하기의 기술은 힘을 잃는 계절을 만난다.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해님이던가, 더위는 긴팔과 두꺼운 소재, 오버사이즈의 옷들로 감추어둔 나에게 포기 선언을 받아냈다. 드디어 나는 바로 보았다.


각자의 외양일 뿐, 반대말은 아니잖아


"너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구나"라며 부러워하는 언니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리송한 마음이 들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빼면 되는 거 아냐?" "사람들은 원래 갖지 못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그토록 나는 거만했고 세상물정을 몰랐다. 옷을 입어보지 않고도, 굳이 사이즈를 확인하지 않고도 옷을 살 수 있는 일의 편리함에 감사하지 못했던 애송이 시절이다.


나잇살이라는 것은 진짜로 존재했고, 임신으로 부풀어진 배는 절대 회복될 수 없는 능선을 구축한다. 며칠만 굶어도 내리던 숫자는 절식과 운동을 3개월 이상 유지해야 겨우 움직였다. 게다가 오래만 걸어도 손가락이 퉁퉁 붓는 내 체질은 잠을 앗아가는 신생아 돌봄 기간 동안 강화되어, 매일 물에 젖은 듯 둔한 몸을 만들었다.


그제야 어떤 노력 없이 얻었던 나의 젓가락 같은 몸에 대한 사람들의 코멘트와 각자의 지형들이 떠올랐다. 저마다의 이유로 원치 않는 모양을 가진 사람들의 푸념들이 거친 유행어들을 만들며 세상을 부유했던 것이다.


내 입은 쉬지 않았다. "진짜 살을 뺄 거야", "10킬로는 넘게 쪘을걸?" 쏟아내었던 말들은 내 지금의 몸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진짜 몸을 들여다본 적도 없이 거부하기만 했다. 그것이 누구의 말이었을까? 말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가 심어둔 기억일까. 난 내 몸을 만들어 본 적 없이 갖고 있기만 했는데, 마른 내 모습이 나의 업적처럼 추억되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지금의 몸은 나의 반대말일 뿐이었다.


눈을 뜨면 하루종일 만나게 되는 광고들 속에서, 우스개 소리를 하고 사랑을 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가운데 위치한 여자들이 말랐기 때문에 - 과거의 내 몸이 나의 업적이었고 반대로 지금의 몸을 부정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일까? 키우는 내내 살 좀 찌우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같은 이유로 나에게 살을 빼라고 하는 걸까?


나를 알게 되는 운동


체중계를 오르는 일 따위에 이를 악물 이유는 무엇이던가. 이렇게 심약한 모양새를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 연민을 보내는 일은, 사실은 한 힘을 더 쓴 피하기일뿐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실제의 나를 바로 보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뿐이다. 예를 들면 운동화를 신고 그저 밖으로 나가는 일 같은.


운동은 솔직한 대화를 하는 친구여서, 내가 한 그대로를 돌려주는 세상에 몇 안 되는 녀석이다. 매일 했다면 매일의 결과를, 핑계를 부렸다면 딱 그만큼의 결과를 들려줄 것이다. 내가 하는 만큼 그대로를 왜곡 없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언젠가 근육은 사람의 지문처럼 고유한 자기만의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용수와 보디빌더의 몸이 다른 건 근육을 다르게 썼기 때문이고,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식스팩이 되거나 에잇팩이 된다던 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가 태생적으로 가진 고유의 모양을 모르고 간다니 조금 섭섭하지 않은가.


수치를 정해 놓은 듯 똑같은 곡선도 아니고, 고기의 중량을 정하듯 이름 붙이는 체중이 아니라.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몸의 곡선과 무게가 있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누군가의 그림보다 오롯한 나만의 그림이 있다는 것이 늘 그러하듯. 그리고 매일의 헐벗은 나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것도.


그리하여, 그래서, 그러므로. 언제가 걸릴지도, 얼마나 게으를지도 모르겠지만, 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피하다가도 서둘러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적어두는 다짐이다. 그 언젠가가 50이든 60이든 숨겨준 나의 일부를 발견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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