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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Sep 22. 2024

눈과 귀와 입을 만족시키는 초량

2024 부산비엔날레 초량재와 초량온당

냉장고 안에 쟁여두었던 초량온당 빵이 소진되었다.

이제 또 대기 타서 빵을 사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초량온당 앞에 있는 태블릿으로 대기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지만, 초량온당 쿠폰을 두고 와서 다시 집에 들렀다가 온다고 초량에 12시가 넘어서 도착하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오는 길 버스 안에서 테이블링 앱을 통해 12시 원격대기등록했기 때문이다.

대기순번 47번.

1시간은 기다려야 빵을 살 수 있다.

빵 사는데 왜 이렇게 오래 시간이 걸리는 걸까.

사야 할 물건들을 정해놓고 오더라도, 막상 눈앞에 다양한 빵을 보게 된다면 응당 고민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얄짤없이 1시간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괜찮다.

바로 부산비엔날레 전시가 진행되는 곳이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초량에 소재하고 있는, 가볼 만한 장소들은 대부분 초량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초량온당, 오초량 등등. 오늘 갈 곳은 바로 초량재.

옛주택의 모습을 그대로 활용한 초량재

초량재 바로 옆에서 공사 중이기에 입구가 마치 공사장을 방불케 한다.

입구부터 재미있는 곳이었다.

대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보이는 뒤집어진 장독대를 보는 재미가 있다.

누군가의 집으로 놀러 가는 기분.

2024 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

초량재에서 하는 비엔날레 전시는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소리와 어둠이 공존하는 전시는 시작부터 설레게 했다.

배경음까지 공사소음이라니, 완벽하다.

김지평 작가님의 작품들

이렇게 아름다운 병풍을 본 적이 있던가.

종이를 잘라 아름다운 문양으로 만들어 붙인 모습.

색동 한복을 잘라 붙인 병풍과 꽃무늬 모양이 마치 할머니 옷장의 옷들을 보는 듯한 기분.

바로 앞에 있는 마이크까지.

독특하다.

버려진 병풍을 모아 할머니, 군인, 조문객, 무당과 가수 등이 생각나게 만드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오브제였다.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니 더 와닿는 작품들이었다.

옛 주택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초량재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버모르겐 작가님의 [은빛특이점]

꽝꽝거리는 소리가 마치 기물을 망치로 때리는 소리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옆집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다분히 작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소리였다.

은색 오브제, 회색의 공간, 녹색의 작은 숲이 함께하고 있었다.

삭막함과 촉촉함이 공존하는 장소의 독특함과 시간의 단순함.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활동가 카를로 줄리아를 추모하며 만든 이 작품의 이야기가 대단하다.

만연한 수동성, 붕괴된 현실, 인공상상력을 모두 담은 거대한 생각 덩어리의 표현이었다.

그냥 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글로,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서 즐거운 관람이다.

슈쉬 슬라이만 & 아이 와얀 다르마디 작가님들의 작품

두 작가의 협업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슈쉬 슬라이만 작가는 흑, 고무수액, 식물, 꽃, 재에서 추출한 안료, 나무 등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에 인간과 풍경, 자연 사이의 불가분의 협력을 주창한다.

두 작가의 협업으로 말레이시아, 일본 등에도 이야기가 연결된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보아 벽에서 돌출된 인간의 얼굴을 보고 놀랐고, 나무로 만들어진 지면보다 높은 공간을 지키듯 서있는 동물들이 귀여웠다.

작가의 의도와 보는 사람의 마음이 일치될 수도 있지만, 다른 생각도 분명히 가질 수 있다.

동물들이 귀여워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서 보았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더 큰 동물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까지 덧대어 보았다.

정유진 작가님의 포춘어스

포춘어스는 펼쳐질 재난을 표현한 모습이다.

깨어진 지구본의 조각들이 마치 깨어진 포춘쿠키를 연상시킨다.

어떠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것일까.

깨어진 지구본의 모습과 대조적인 배경이 이질적이다.

남아있는 옛 주택의 모습과 사람이 살고 있는 집, 뒤로 보이는 푸른 산까지.

다가올 재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현실의 모습?

작가의 의도와 어우러지는 완벽한 전시장소까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초량재 2층 화장실 입구

2층 에어컨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문도 작품인 줄 알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나는 조심히 문을 열어보았고, 화장실인 것을 알았다.

상당히 현대적인 화장실의 모습과 작고 소중한 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참 재미있는 공간이다. 초량재는.

그 외에도 다양한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다른 곳에 전시된 작품들도 보고 싶어 졌다.

하지만 나는 오늘 정해진 스케줄이 정해져 있지.

2024 부산비엔날레 초량재 관람이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중앙도서관 수정분관에 들러 문학자판기 인쇄도 하고 물도 한 모금 마셨다.

중앙도서관 수정분관에는 전자레인지도 있다.

초량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수정분관 도서반납기 옆에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편의점도 아닌데 편의시설이 좋구먼.

문학자판기에서 말해주는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바로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좋은 말이다.

엄마와 함께 하고 있는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본인이 할 줄 아는 것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엄마가 불편해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그냥 내가 해주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시간이 적게 들지만, 결코 내가 해주는 것이 엄마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방법을 알려주어 엄마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옳다는 사실을 오늘의 명언으로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곧 내 차례가 돌아와서 나는 위풍도 당당히 초량온당으로 향했다.

초량온당 냉장식품은 언제나 핫하다

당당히 내 번호 47번을 보여주고 입장하면 쟁반을 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망설임 없이 나는 냉장고 앞에 선다.

다행히 피스타치오 맘모롱과 초량 맘모롱이 남아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구먼.

냉장고 문을 열고 쟁반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초량온당 상온 빵들의 모습. 오늘은 유독 에그타르트가 맛있어 보였다.

냉장빵만을 쟁반 가득 채우고 카운터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에그타르트에 눈길이 갔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계란의 폭신함과 달달한 머스터드크림, 적당한 식감의 타르트지가 느껴졌다.

분명히 사야 한다.

그렇게 냉장빵들 사이에 에그타르트가 당당히 자리 잡았다.

이렇게 내 돈 쓰는데 기분 좋은 일이라면 매일 하고 싶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지.

초량온당 도장깨기는 계속 된다.

에그타르트 또한 극강의 맛이었다.

진한 계란향이 고소했고, 커스터드 크림의 질감이 오묘했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질감, 몇 번 씹지 않아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쉬운 맛.

왜 난 오늘 처음 먹었던가.

초량온당은 모든 빵이 맛있는 집이던가.

서비스로 받은 빵마저 쫄깃한 식감의 향기로운 크림치즈빵이었다.

사장님 대어를 낚으신 겁니다.

머지않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나는 외출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낯선 것에서 오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미 찾은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외출을 한다.

그런 와중에 2024 부산비엔날레 전시를 초량온당 근처 초량재에서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출발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치우는 일은 즐겁다.

그렇게 나는 오늘을 성공적으로 보낸 듯하다.


초량재에서 즐거웠기에 다른 곳에서도 하는 전시를 보기 위해 다른 날, 다른 장소에 방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추석 명절 다음날은 부산비엔날레 전체가 휴관인 사실을 몰랐다.

역시 예기치 못한 일에는 상상 이상의 일이 벌어진다.

부산근현대역사관 꼭 가보세요

추석명절을 끝낸 다음날은 휴일의 여운이 남는 평일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부산근현대역사관까지 찾아갔지만, 웬걸.

휴관일이었구나.

나는 멍청이인가.

허무해하고 있을 때, 내 눈앞에 아이를 안은 가족이 근현대역사관 앞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만 바보가 아니었구나.

갑자기 드는 안도감.

빨간 날이 아니니까 문을 열었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포동까지 온 것이 아깝지 않게, 2024 부산비엔날레 다른 전시장소인 한성 1918로 향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도보로 3분이면 도착한다.

한성1918과 오늘의 명언

한성 1918 부산생활문화센터의 문은 열려있었다.

다만 전시가 열리는 1층 문이 닫혀있을 뿐.

그렇게 아름다운 헛걸음을 했다.

1층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여유롭게 있었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앉아서 쉴 때, 나처럼 2024 부산비엔날레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3팀이 더 있었다.

아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리고 나오는 길에 부산문화재단에서 설치한 문학자판기에서 오늘의 명언을 뽑아 들었다.

오늘 나에게 꼭 맞는 명언이었다.


인생은 10%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와 90%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반응을 하는가입니다.

-데니스 킴브로


맞는 말이다.

인생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습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나타나는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오늘 역시 그러했다.

2시간이 걸려 도착한 부산근현대역사관과 한성 1918 부산비엔날레 전시관의 문이 닫혀있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장소를 찾아갔고, 그 덕분에 동지들을 만났다.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로 인해 위로받았다.

세상은 멍청하게 살아도 그럴듯하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 스스로가 나의 하루를 망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나온 김에 시장구경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먹을 것, 예쁜 것들을 찾아보고.

사람구경도 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기분 좋은 드라이브도 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화를 내서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인가.

상황을 달리 본다면 더 좋은 방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10월 20일 전시가 끝나는 날 전까지 꼭 방문을 다 해봐야지.

그렇게 새로운 다짐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더운 날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

가을장마가 지나가면 금세 가을이 올 것이다.

지난했던 여름이 가고 시원한 가을이 내 옷소매를 길게 해 줄 것이다.

당신에게도 분명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날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럴 때마다 본인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더 미소 짓는 하루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미소로 세상이 환해지도록.

(자료출처 : 2024부산비엔날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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