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할 수 있는 신랑의 친구
2021.01.07 말씀묵상
[요3:29-30]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말씀의 비유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결혼식의 그 영광스럽고 즐거운, 축제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인류사를 보아도 역사적으로 혼인잔치는 늘 축하받아 마땅한 행사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친한친구로, 그곳에 혼인을 축하하러 간 자의 얼굴에도 그에 못지않은 기쁨이 서린다.
결혼식을 축하하면서 자기가 신랑이나 신부보다 더 주목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축하해주고나서, 그들이 아름답게 식을 치르는 것을 보는것만으로 배가부른 기분일것이므로. 그보다 더 좋을순 없는 기쁨을 누릴것이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삶이란 과연 이와 같다는 세례요한의 비유가 탁월하다고 느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에서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결혼식은 그 순간이지만, 우리는 꽤 오래산다. 수십년 동안,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그 삶. 하나님은 나의 삶을 축복하시고, 나를 쓰신다는 점에서, 물론 그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는 하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시긴하지만, 내가 완벽한 들러리는 아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이유도, 그 아들을 보내신 이유도 결국엔 사랑주고 사랑받는 대상으로 이 인류를, 나를 택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 2인칭이 된다는 소리다. 그러면 이 말씀의 결정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조금 어렵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게 익숙한 세계관은, 나의 삶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예수님이 내 육체에 온전히 들어오신다면, 나는 매일매일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한심한 자기자신의 모습을 이겨내려 보이지 않는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실패할까봐. 실패할까봐. 내가 예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하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되시기에 내가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몸부림치지 않을것이다.
물론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더 열심히 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충분히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아서 더 힘들다. 충분히 실력을 쌓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 돈도 없고, 가진 게 없어서 그 결핍이 나를 계속해서 삶의 현실로 몰아붙여가도록 만든다.
세례요한에게 배운다. 말씀에서 배운다. 즐거운 축제와 같은 신앙의 태도를 갖는 것. 나의 구주 예수님께 내 좋은 모든 영광들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나는 기뻐하는 그삶. 오늘처럼 내마음대로 되는 일들이 많이 없는 그런 지질한 밑바닥에서도 그를 꿈꾸며 산다. 성령을 구한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