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다짐
남편은 친한 사람들과 놀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었다. 술은 그 과정에서 수단일 뿐이었다.
(혹시나 오해가 생길까 봐 덧붙이자면 술 마시고 사고 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술 취하면 귀가본능이 강하게 올라오고 집에 와선 햄버거나 라면 먹고 그대로 잔다.)
둘이었을 땐 남편이 오기 전까지 잠 못 들고 기다렸다. 가끔 새벽에 집까지 걸어오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밤공기가 찬데 감기 걸리진 않을지 이런 걱정을 하고 있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도 걱정은 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손해인 것 같은 기분이 추가되어 때때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육아에는 개인의 에너지와 시간이 들어가다 보니 '누가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는지'를 가지고 자꾸 셈을 하게 됐다.
'누군 나갈지 몰라서 안 나가는 줄 아나?'
'아이 낳으면 자기가 다 보겠다고 약속 한 남편은 어디 갔나? 이러면서 둘째를 낳고 싶다고? 흥! 둘째는 절대 없어'하면서 속을 삼켰다.
남편은 매주 최소 1~2회씩 육아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일부러 커피숍이라도 가서 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난 내 방에서 혼자 문 닫고 앉아 이렇게 글을 쓰거나, 정리하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최고의 휴식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집에서 방 문을 닫고 나 몰라라 하기엔 내 마음이 불편했다.
때론 속이 답답해 주위에 이게 맞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남편은 술 문제만 빼면 자기만 한 남편이 없다고 하는데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남편이 재택근무인 것부터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나 역시 이게 얼마나 복인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지쳐갔다. 집에 세 사람이 상주함으로써 해야 할 집안일은 이전보다 곱절 늘어나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남편도 마냥 속 편한 건 아니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되면서 내게 자주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날짜 개념이 사라지네"하고 묻곤 했다.
나는 차차 부부가 왜 스킨십이 줄어드는지, 뜨거운 사랑을 했던 남편아내가 아닌 아빠엄마로만 존재하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전자 조합으로 태어난 아기를 보며 가족의 결속력이 더 생기는 것도 맞지만 '이렇게 부부가 가족이 되어가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들면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부관계가 신생아 때 많이 힘들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피해 갈 줄 알았지만 피해 가지 못했고 실로 결혼생활 중 제일 힘들었다.
이 때로 인해 난 둘째 생각은 싹 사라졌다.
(돌 되면 아기가 너무 예뻐서 지금을 잊고 둘째 고민을 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누군가가 툭 던진 한 마디로 말꼬리 잡기가 이어졌다. 서운함이 쌓이고,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고, 서로를 찌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모든 게 말 때문인 것 같아 차라리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사라진 집은 온기도 사라지고 있었다.
대화가 사라지자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남편의 마음은 모르겠으나 나에게 남은 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하루하루 보내자 하는 마음만 남았다.
집이라는 공간은 응당 온기와 애정이 흘러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최악으로 치닫는 거 같았던 우리 관계는 아이 100일을 기점으로 나아지고 있다.
아이가 밤중에 5시간씩 자기 시작하면서 새벽 수유도 1회로 줄었고 조만간 새벽 수유도 사라질 것 같다.
우리도 보다 밀도 있는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이가 우리와 눈맞춤, 미소, 옹알이 등으로 교감하기 시작하면서 공유하고 싶은 순간순간이 많아졌다.
술과 관련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 중이다.
스트레스받는 건 이해하지만 우리의 삶이 출산 전과 동일할 수 없는 것, 한 사람의 무너진 컨디션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상이 보다 규칙적으로 돌아가야 우리 셋 모두가 편한데 때때로 과한 음주가 그걸 깨뜨리고 있는 것 등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진지하게 전달했다.
남편은 아가도 예쁘지만 술도 마시고 싶고 늦잠도 자고 싶지만 이제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는 걸 실전 경험으로 깨닫는 중이다. 술 먹은 다음 날도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육아의 몫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된 남편은 전보단 조절해서 마신다.
실전 육아를 하면서 '이혼을 결심했다'기 보다는
'이렇게 살다 보면 이혼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몇 차례 들었다.
그래서 글 제목도 <아이를 낳고 이혼을 생각하다>이다.
이혼이 거창한 게 아니라는 현실감이 생기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가족이라는 것도 우리가 서로 잡고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지 놓아버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남편이라는 울타리에 기대지 말고 나 자신으로 살자'라는 현실감각으로 되돌아갔다.
나 자신으로 잘 살게 되면 어떤 위기가 와도 가족도, 나도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
어떤 상황이 와도 내 아이와 살 수 있는 경제적, 정신적, 환경적인 기반을 지금보다 더 탄탄하고 견고하게 잘 쌓아둬야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다진다.
아이가 집에 오면서 신체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소용돌이 같은 감정을 극과 극으로 느끼며 정신적으로도 고통받던 시간이었다. 육아를 하면서 또 개인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다.
신체적으로 힘들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시간 배분은 어떻게 하는지, 아이 케어에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육아하는 나의 모습,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알던 상대방이 아닌 새롭게 재정의를 내려야 한다.
등을 돌리기 전에 지금 우리는 다시 서로에 대해 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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