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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며 사는 삶은 청산하겠습니다

by 한고운

체력과 인내심의 바닥을 찍으며 자괴감에 절었던 폭풍 같은 영유아기를 지나 어느새 자녀들이 훌쩍 자랐다. 엄마 껌딱지였던 녀석들이 조금씩 독립을 하면서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여유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슬슬 숨통이 트였다.


'그래 그동안 온전히 애 둘 키우느라 수고했으니 이제 이런 자유도 즐겨야지!'라는 생각에(일종의 보상심리였을지도) 가끔은 맛있는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예쁜 카페에도 가 보고, 꽃을 사기도 했다. 짬짬이 책도 읽고, 운동도 하며 내 몸과 마음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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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행복하다'

정말 그랬다. 별거 아닌 일상에도, 외벌이로 그리 넉넉한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형편이 아님에도, 하루하루가 감사한 일들로 넘쳐났다.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에 혼자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달콤했다.


반면 남편은 나와 정 반대였다. 늘 회사 일에 치이고 사람들 관계에서 정신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부담감과 책임감이 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업무 성과의 압박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매일 악몽에 시달리고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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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왜 나만 행복한 거지? 왜 저 사람은 안 행복한 거지?' 혼자만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다고 나라고 아무것도 안 하며 무임승차 하는 삶은 아니었다. 자녀들을 살뜰히 챙기고 집안을 척척 해내며 가정의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써의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수행해내고 있었다.


경제적인 면을 홀로 감당하는 남편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측은지심도 느껴지지만 종종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었다. 회사로 인한 스트레스를 집까지 가져와서 며칠 동안 입은 꾹 닫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아이들을 대할 때면 지치기도 했다.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빠는 왜 맨날 늦게까지 회사에 있는지, 왜 우리랑 놀아주지 못하는 건지 등등 아이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끔찍이 좋아하는 남편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같이 부대끼며 놀아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내내 회사에 매여있는 이 상황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속상하다며 말이다.




워라밸을 유지하며 남편과 우리 가족이 좀 더 사람답게,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1. 회사를 옮긴다

이미 이직은 할 만큼 해봤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었다. 결국 회사라는 곳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 결론을 얻었다.


2. 사업을 시작한다

남의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바에 차라리 애정을 가지고 내 사업을 일구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함께 일을 한다면 일정 부분이나마 남편의 짐을 덜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3. 이사를 간다

이미 서울치고 충분히 자연친화적인 곳에 살고 있다지만, 아예 거주지를 바꾸면 어떨까? 집도 넓고 주변 환경도 지금보다 나아진다면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삶의 질이 상승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평소에 입버릇처럼 "서울을 떠나고 싶다"라고 말하던 나였다.


1. 층간소음

우리 가족을 내내 힘들게 했던 문제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쿵쾅거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졌고, 몇 차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오히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윗집의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매일 아침을 층간 소음으로 한껏 짜증 난 상태로 시작하는 게 너무 싫었다. '오늘도 또 뛰는구나. 어떻게 저렇게 아이들이 마치 운동장처럼 내내 뛰어다니는데 부모가 컨트롤을 전혀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분노가 점점 쌓여갔다.


2. 1인 1방 보급이 절실

지금의 20평대, 방 2개 아파트로는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을 감당하기 점점 어려웠다. 게다가 성별이 다른 남매라서 더더욱 각 방으로 분리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곧 사춘기도 올 테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한 아이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지내기가 미안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재산으로 서울에서 방 3개 이상인 30평대 이상의 집을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경기도권으로 옮길 바에 아예 이 참에 그렇게도 바라던 바닷가 근처 지역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슬슬 마음이 꿈틀거렸다.


3. 최악의 미세먼지

이 또한 탈 서울을 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단순히 일시적인 삶의 질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생존을 위협하는 큰 문제 아닌가.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 도심, 환기조차 할 수 없고 마스크가 아니면 바깥 외출도 꺼려지는 나날이 점차 쌓여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한참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미세먼지가 나빠서 안 돼. 빨리 집으로 와."라며 외출을 자제시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지쳐갔다. 서로에게 고역이었다. 최소한 걱정 없이 숨 쉬고 살고 싶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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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공감은커녕 다들 반응은 비슷했다.


"원래 다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들어."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직장인의 삶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삶이 최고라니까."

"그래서 앞으로 뭐 먹고 살 건데?"

"갑자기 서울을 벗어난다고? 미친 짓이야."


하긴 그랬다. 주변 지인들을 봐도 다들 치열한 삶이었으니까. 야근은 이미 기본 옵션이고, 막차를 타고 집에 겨우 온다는 직장인, 자정이 넘어 집에 와서 겨우 3~4시간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다시 출근하는 게 일상이라는 연구원, 주말이고 휴일이고 연이어 터지는 비상사태에 돌아가며 정신없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맞벌이 부부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그저 생존하는 게 기적일 뿐.




"우리는 무얼 위해 사는 걸까? 힘들어도 좀 더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질 거라 믿다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으면 어쩌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이대로 사는 게 과연 맞는 건지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여보, 나는 요새 전혀 행복하지 않아"

한참을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남편이 겨우 입을 뗐다. 본심이 담긴 이 한 마디가 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우리 강릉 가서 삽시다. 한번 해보지 뭐."

"그럼 회사는? 돈은 어떻게 벌고?"

"누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실제로는 내가 남편보다 5살 어리다. 뭔가 주도적인 상황에서는 누나이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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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번아웃이 오기 직전인 나름의 위기상황에 도달했고, 나는 점점 서울이라는 환경에 불만이 쌓여갔다. 뭔가 큰 변화와 결심이 필요했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의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했다. 딱히 정해진 것도, 보장된 미래도 없었지만 과감하게 모든 것을 리셋해 보기로 했다. 뭘 하더라도 최소 지금보다는 낫겠다 싶은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인생의 골든타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고민들과 생각이 꼬리게 꼬리를 물었다. 어쨌거나 결론은, <아이들 어릴 때, 최대한 같이 시간을 보내며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이루자는 것.


물론 서울에서 태어나고 40년을 넘게 살았던 곳을 떠나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늦게 전에 미친척하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후회할 때 후회 하더라도,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돌아오게 되더라도, 일단 질러 보기로 말이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아니던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 한 번쯤 일탈도, 한 번쯤 실패를 한들 괜찮겠다 싶었다. 좁디좁은 서울을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우리가 꿈꾸는 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자발적 강릉 이주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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